다양한 국가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유럽에서는 문화의 융성과 함께 많은 제국이 흥망성쇠를 이루었습니다. 국가라는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던 중세시대에는 영주가 모여 하나의 연합을 이루었고 지휘관에 해당하는 기사의 능력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습니다.
보병에 해당되는 병력은 영주의 영토에 속한 농민들이었고 농민과 군대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영주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했기 때문에 일부 친위대 성격을 가진 병력 이외에는 정비된 군대라는 존재가 없었습니다.
유럽의 3대 국가인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의 중심에 위치한 스위스는 3개국의 중심에 선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스위스에 연합이 동맹을 맺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침공을 시도했고 레오폴드 1세는 농민군인 스위스를 쉽게 생각했습니다.
장창과 할버드로 무장했던 스위스 농민군은 갑옷과 투구를 난도질했고 산비탈에 선 기사들은 어쩔 줄 모르며 우왕좌왕하다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모르가르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스위스 농민군은 유럽에서 최강 병력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라이슬로퍼(Reislaufer)" 로 불리운 스위스 용병이 탄생하였고 유럽 각지에서는 용맹스러운 스위스 용병과 계약하기를 원했습니다. 각 지역에서 성장한 스위스 용병은 일체된 장창술로 유럽 내 최강의 자리를 지켰고 계약한 국가와의 신뢰도 높았습니다.
스위스 용병의 활약을 지켜보던 신성 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는 스위스 용병과 같은 병력을 직접 운용하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독일 지역을 기반으로 한 "란츠크네히트" 를 창설하게 됩니다. 란츠크네히트를 창설한 게오르그 폰 프룬츠베르그(Georg von Frundsberg) 는 '란츠크네히트의 아버지' 로 불리웁니다.
Land(시골), Knecht(머슴) 을 의미하는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 는 스위스 용병에 맞설 수 있는 병력으로 성장하였고 유럽 내 또 하나의 최강 용병 전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같은 지역에서 성장하여 합을 맞춘 스위스 용병에 비해 결속력은 덜했지만, 전장에서는 용맹했습니다.
당시 용병은 꽤나 높은 임금을 지급받았으며 전쟁에서 활용하는 무기와 각종 장비를 구입할 수 있는 대규모 상인 연합이 뒤를 따랐습니다. 용병은 어느 곳에서나 지급 받은 돈을 물 쓰듯이 소비했고 전쟁 수행 능력이 뛰어나 여성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란츠크네히트는 유럽 내에서 스위스 용병과 함께 쌍벽으로 이루고 있었으며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가 결성한 동맹과 합스부르크 왕가가 벌인 '코냑 동맹전쟁' 에서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합스부르크 왕인 카를 5세는 로마를 점령하기 위해 란츠크네히트를 고용했고 사상 최대의 비극이 일어납니다.
게오르그 폰 프룬츠베르그와 부르봉 공작 샤를 3세는 란츠크네히트를 고용해 로마로 진격하였으나 카를 5세가 지급한 용병료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불만에 가득찬 란츠크네히트를 다독이던 프룬츠베르그가 갑자기 사망하고 샤를 3세가 전사하면서 결속력이 약한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로마에서 스위스 용병과 마주한 란츠크네히트는 광분한 상태로 스위스 용병을 전멸에 가깝게 몰아붙였고 로마 전체를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면서 악행을 일삼은 란츠크네히트는 스스로 악명을 만들었습니다.
신의를 지키며 성장한 스위스 용병과 대규모 병력을 자랑했던 란츠크네히트는 전장의 상황이 급격하게 화포로 바뀌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악명 높은 란츠크네히트는 사라졌지만, 스위스 용병은 아직도 바티칸에서 교황을 지키는 친위대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