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6. 9. 18. 07:00




세계 2차대전의 주역인 일본은 동아시아의 헤게모니를 위해 많은 전력을 모으고 있었고 새로운 개척을 위해 식민지가 필요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자원과 인력이 모자랐고 가쓰라 테프트 조약으로 맺은 미국과의 밀약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침략을 묵인하는 댓가로 필리핀을 내준 것을 후회하며 미국과 대립하기 시작한 일본은 강력한 군사적 대응으로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해군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일본은 아키가, 소류, 카가, 히류등의 태평양함대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함재기만도 360대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태평양함대보다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병력은 사기가 충천했고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략은 일본 해군 제독들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진주만 공격을 위한 시뮬레이션을 마친 야마모토는 나구모 주이치 제독과 함께 전권을 일임합니다.


나구모는 판단력이 출중하고 부하들을 아끼는 명장으로 이름이 드높았었고 일본의 태평양함대는 무적이라고 불리우고 있었습니다.





1차대전을 치른 미국은 더 이상의 전쟁을 무의미하다는 이유를 들어 유럽과 태평양전장에 참전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미국내 여론은 피곤한 전쟁보다는 실익을 챙기는 것에 더 촛점을 맞추고 있었고 정치권의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직접적인 참전보다는 양쪽에서 판매되는 무기들의 수익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남태평양의 대부분은 미국의 식민지하에 있었고 미국으로서는 전쟁에 관여할 명분도 이익도 없었습니다. 경제적인 압박으로 일본을 견제하고 있었을 뿐 군사적인 대응에는 회의적이었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때도 미국은 전혀 대응을 하지 않을 정도로 전쟁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치밀한 계획을 세운 일본함대는 진주만을 공격했고 아무런 대응도 없는 미군 전력을 손쉽게 타격할 수 있었습니다. 초기에 출격한 100대의 전투기로 항공기 수백대가 파괴되었고 전함과 상선, 시설물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2차로 공습한 일본 함상기들은 아무런 응사없이 진주만을 공격했고 미군은 8척의 전함과 10척의 상선을 잃었습니다. 산호섬인 진주만은 불길에 초토화가 되었고 미국 본토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이미 진주만 공격에 대한 암호해독을 했던 전문가들은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대통령과 태평양 사령관에게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것은 미국의 태평양함대가 모두 진주만에 집결해 있으며 항공모함도 포함되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기 때문입니다. 태평양함대의 전력을 무력화시키고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필리핀일대를 점령하려고 했던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태평양함대의 엔터프라이즈, 렉싱턴, 호르네트, 요크타운 항공모함은 다행히 진주만에 정박하지 않았고 이를 알게 된 야마코토 사령관은 나구모 제독에게 다시 진주만을 공격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나구모 제독의 상관이기는 했지만 전장에서는 전권이 제독에게 있기 때문에 나구모에게 맡길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고 생각한 나구모 제독은 더 이상의 위험부담은 불필요하다는 판단을 했고 일본함대를 본토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진주만 공격으로 자존심이 상한 미국은 전쟁 참전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판세를 판단한 히틀러는 유럽의 참전을 종용하는 선전포고를 미국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이로써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입장이 되었고 일본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계가 되었습니다.


막대한 자본과 생산시설을 군수물자로 돌리게 되었고 일본은 미국의 원자탄 2발에 의해 패전국이 됩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입니다.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야마모토 사령관의 의견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태평양의 전장은 역사와 확실히 다르게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