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2016. 5. 11. 23:15




지금도 축구를 즐기고 있는 아마추어로서 가장 존경하는 선수를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차범근입니다. 지금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던 시절 홀로 독일에 진출해 오롯이 축구만을 위한 삶을 산 그의 모습은 존경 그 이상의 칭송이 아깝지 않습니다.


유럽의 유수의 클럽에 진출한 선수들이 있지만 차범근을 쫒기에는 아직은 부족함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차범근이라는 본명보다는 차붐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전히 레전드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축구계의 족적으로 따지면 당연히 축구협회의 회장이 되어야 하지만 여타의 스포츠계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축구협회는 차범근을 달갑지 않아합니다.


그가 국가대표 사령탑으로 선임되어 월드컵에 출전했을 때가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시기라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근시안적이며 지협적인 모습은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 진출하던 시기에도 있었습니다. 위대한 선수가 될 수 있는 재목이라는 것보다 국가를 배신할 것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독일 진출을 막았고 다름슈타트에서 어렵게 선수생활을 시작하던 차범근에게 병역의 의무를 핑계 삼아 본국으로 소환을 했습니다.


차범근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병역의 의무를 마쳤습니다. 빅리그로 진출시켜야 한다는 국민들의 성원 덕분에 다시 분데스리가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오롯이 축구만을 생각했고 축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기에 살벌하기까지 한 리그에서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지금의 챔피언스리그와 동급의 UEFA에서 우승을 견인하며 프랑크푸르트 시청에서 팬들에게 트로피를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독일로 외화를 벌러 떠났던 간호사와 광부들은 차붐의 인기와 함께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그라운드보다 교민사회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라운드에서 자신의 플레이가 인기를 얻을수록 독일에 건너간 한국인에게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가 독일에 진출했던 당시의 나이가 27살로 축구선수로서 유망주를 거쳐 정점에서 내려가는 시기였습니다. 현재 유럽에 진출한 선수들이 20대 초반의 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의 상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79년 27살의 나이에 홀홀단신으로 분데스리가에 입성했고 37살이 되는 1989년에 은퇴를 했습니다. 외국인으로 308경기 98골의 기록은 최고의 수준이었고 나이를 감안하면 엄청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 더 감동스러운 것은 페널티킥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10시즌동안 매 년 30경기를 뛰었고 경고는 단 한장....(차붐의 성향을 알게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프랑크푸트트 시절 UEFA 결승에서 만난 에버튼의 감독 알렉스 퍼거슨 경이 언급한 '멈출 수 없었던 그'가 바로 차범근이라는 것은 감동을 넘어선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용솟음 치게 합니다. 미하일 발락, 루이스 피구, 마이클 오언의 롤모델이 차범근이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그의 업적은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로도 표현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위르겐 클린스만이 차범근과의 비교를 거부한 인터뷰는 일본의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 장군과의 비교를 거부한 것의 데자뷰입니다. 차붐이 이순신 장군과 같이 몸바쳐 나라를 구하지 않았지만 그의 공로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80년 초반만 하더라도 동북아의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하던 한국, 코레아를 독일에 알린 것이 차범근이었고 재독동포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세대들은 차두리의 아버지 또는 해설자 차범근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의 위대한 전설이라는 것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격을 높이는 것이 외교력과 경제력에만 있다는 발상은 재능을 가진 인재들을 키워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해설자 차범근보다는 시대를 이끌었던 축구계의 레전드로 기억되기를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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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