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6. 2. 10. 12:57



포은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이었는가?



어지러운 고려 말 권문세족들에게 집중된 권력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성리학을 바탕으로 성장한 신흥사대부들은 새로운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성리학의 창시자였던 정몽주는 뛰어난 정치능력과 외교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려 말 가장 두각을 나타내며 리더로 떠오른 인물이었습니다.


이성계, 정도전과 함께 개혁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급진개혁파의 행보가 자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는 온건개혁파의 노선에 합류했고 고려라는 타이틀 안에서 개혁하기를 원했습니다. 동문이자 라이벌이었던 정도전이 구상하고 있는 신권 중심의 새나라에 재상이 될 수 있었지만 자신의 길을 더 옳다고 믿었습니다.


성리학을 신봉했던 유자들은 성리학의 근원인 친원정책을 주장했지만 정몽주는 쓰러져가는 원나라보다는 떠오르는 명나라를 신봉하는 친명을 주장했습니다. 이성계, 정도전이 폐가입진을 내세우며 우왕과 창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동참을 했고 정창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정도전의 개혁에는 개민수전과 신권의 강화, 국가주도형 운영체제가 포함되어 있었고 숭유억불정책도 함께 시행하려고 했습니다. 정도전의 새나라의 구상을 들은 뒤부터 정몽주는 자신의 생각을 숨긴 채 이성계,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혁에서 발을 빼고 자신만의 노선을 걷게 됩니다. 이 후 치밀하게 급진개혁파를 축출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게 되는데요.





성리학 동문이며 40년지기인 정도전을 탄핵해서 제거하려고 했으나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정몽주가 하려는 고려 내의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철퇴를 맞고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정몽주의 정치적인 행보로 보았을 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일관된 것과는 차이가 있고 "충"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맹목적이었던 "충"으로 조선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간신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정몽주를 충신으로 만든었던 것은 태종 이방원입니다. 정몽주의 죽임을 주도했던 이방원은 후에 정도전도 제거를 하게 됩니다.


정도전이 꿈꾸었던 신권 중심의 개혁에 반대하고 있던 이방원은 자신의 세력을 키워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되는데 "난"이라고 표현되기는 했지만 불과 40여 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난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규모를 가진 쿠테타는 아니었습니다. 2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신하들의 본보기가 필요했습니다.


이 때 부각된 인물이 정몽주였고 이방원은 복권을 통해 간신에서 충신으로 이미지를 바꾸었으며 정몽주가 주창한 성리학을 바탕으로 성장한 사림파가 정치적 세력을 확대하면서 충신의 이미지를 더 부각시켰습니다.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이방원에 의해 충신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으니 역사적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몽주가 고려에 충을 실천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왕과 창왕을 섬기기도 했으며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는 데도 동참을 했고 급진개혁에 동참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몽주의 정치적 행보를 종합해보면 "충"에 대한 왜곡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정치적 목적이 달라 급진개혁파와 뜻을 달리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현세에 들면서 포은 정몽주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있는데요. 권력을 잡은 자에 의해 쓰여진 역사에서 정몽주는 확실히 충신의 아이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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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