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5. 10. 25. 16:36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통일을 계획하고 박차는 가하는 동안 두명의 야심가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예야스는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자신들의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는 데 명분을 가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도 일본통일을 이뤄냈다.


일본통일을 이룬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조선에 협력을 요구했다. 조선은 아버지의 나라인 명나라를 정복하는 데 협력할 수가 없었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에 빠져 갈 곳을 잃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차례의 통신사 파견에도 답을 얻지 못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한다.





조선은 개국 초기의 왕권의 흔들리는 형국이 세조에 들어서면서 안정이 되어 꽤나 안정적인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백성들은 권세가들에 의해 궁핍해져 있었으나 커다란 혼란을 겪지는 않았고 그러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정의 대신들만이 정치적인 암투로 혼탁해져 있었을 뿐 백성들을 주변국의 상황을 알 턱이 없었다.


조선 침공 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많은 정보원을 조선에 보내 군사력을 알아보게 한다.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상인, 승려들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보를 제공했는 데 조선의 군대는 없다는 보고였다. 이런 보고를 듣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수장들은 적잖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은 수만의 군사를 보유하고 있는 데 군대가 없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재차 정보원을 보내 조선의 상황을 살폈고 그 정보다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어 임진년에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정보원들의 정보는 정확히 맞았고 조선땅에 발을 들인지 불과 20일만에 한양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사에 나오는 군대를 보면 장수보다는 의병들이 많았던 이유가 바로 이 것이다. 선조는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의 무기 때문에 승리를 할 수 있었다는 변명을 했지만 조총은 그리 파괴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오랜 태평성대와 정치적인 혼란이 이유였지만 선조는 애써 다른 핑계를 대기에 바빴고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을 쳤다.


하필 이런 시기에 선조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조선에게는 불운이었고 일본에게는 행운이었다. 하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백성들의 힝이었다. 이런 나라의 상황을 보고 가만히 있을 백성들이 아니었다. 농민, 평민, 승려할 것 없이 모두가 의병이 되었고 그들의 노력으로 일본군은 당황하게 된다.


육로로 진격한 일본군의 보급을 책임지는 수군은 이순신 장군에게 참패를 하며 보급로가 끊어졌고 단기간에 조선을 함락하고 명나라로 진격하려는 풍신수길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종적인 목표가 명나라인 것을 알게 된 명나라도 파병을 했으나 명군의 사상을 염려해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지 않았고 불리한 형국이 되면 제시하는 일본의 강화에 응하곤 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7년동안 늘어진 것은 명나라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7년의 전쟁동안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고 세자인 광해군은 군을 정비해 많은 업적을 쌓게 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공 7년만에 병을 얻어 사망하게 되고 조선 침공을 반대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권을 갖게 되면서 조선에서 퇴각한다.


7년의 긴세월동안 조선의 국토는 황폐해졌고 도공과 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넘어갔다. 평화의 시기가 너무 오래된 것이 조선에게는 독이 되었다. 하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혜안을 가진 많은 분들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지는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손쉽게 한양까지 진격한 것은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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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