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8. 9. 25. 09:15

 

오스트리아인인 '아돌프 히틀러' 는 2차대전을 일으키면서 아프리카와 러시아를 장악하고 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혀 일본과 3국을 건설하기로 계획했다. 일본이 동아시아와 중국, 인도차이나까지 점령하게 되면 히틀러 계획은 방점을 찍는 것이다.

 

 

 

 

2차대전 초기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를 두려워했고 두 나라가 전쟁의 판도를 가늠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전통적으로 육군이 강력했던 프랑스와 해군이 강력했던 영국을 사이에 둔 히틀러는 '하인츠 구데리안' 이 구상한 전격전이라면 승부해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히틀러 예상과 달리 영국은 무기력했고 프랑스는 오합지졸이었다. 에르히 폰 만슈타인 장군이 입안한 낫질 작전으로 프랑스를 쉽게 점령한 히틀러는 구데리안을 앞세워 전격전으로 덩케르크까지 진격했고 도버해협을 건너는 영국이 다시 넘어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히틀러 예상과 달리 영국은 미국에게 무기를 지원받아 재참전했고 지난 굴욕을 만회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에 무게를 두지 않았고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으며 유태인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나치를 중심으로 한 친위대는 유태인 학살에 전적으로 나서면서 국제적인 비난이 휩싸였고 히틀러는 이례적으로 한 사람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당시 교황이었던 "피오 12세" 였다.

 

독일 국민 다수가 카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교황이 공개적으로 히틀러와 독일이 자행한 유태인 학살에 대해 비난 성명을 낸다면 전선에 나가 있는 장교와 병사는 회의적인 생각에 빠질 수 있고 히틀러의 원대한 계획이 무산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친위대장 '칼 볼프' 에게 교황의 눈치를 살펴보라는 임무를 주었고 볼프는 피오 12세에게 향했다. 겉으로는 눈치를 살피라고 말했으나 교황청이 공개적으로 비난 성명을 내지 말라는 압박을 하기 위함이었고 교황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교황이 로마를 떠나기를 원했으나 교황은 바티칸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히틀러도 이에 승복하는 방법을 택했다. 중재자로 나선 칼 볼프는 자신의 역할이 컸다고 후술했으나 히틀러의 의중을 그대로 전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이탈리아와 로마를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다는 협박은 교황에게 직접적인 적대감의 표시였고 교황은 공식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는 어려웠다. 비공식적으로 레지스탕스를 돕는 역할을 하거나 연합군에게 호의적인 의사를 표시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히틀러는 동부전선에서 유태인 학살이 심화되면서 교황의 의중을 지속적으로 살폈고 독일 병사들이 나약해지는 것을 우려해 교황청을 달래기도 했다. 2차대전이 막바지로 향하면서 히틀러는 수세에 몰렸고 공식적인 의사를 드러내지 않은 교황청은 비난에 휩싸였다.

 

독일 패망 후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명하지 않은 교황에게 히틀러의 동조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히틀러가 사망하지 않고 아르헨티나로 도주하는 데 일조했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히틀러가 유일하게 눈치를 본 인물이 교황이기는 했으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반응형
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