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8. 5. 17. 07:00


시리아 내전과 함께 불을 지피고 있는 이스라엘 분쟁 사태가 미국의 힘을 업고 내리막을 향해 달리고 있다. 공동구역으로 정리한 UN의 입장과는 달리 예루살렘을 수도로 규정한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고향이라고 주장했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예루살렘(Jerusalem) 의 뜻은 "평화의 마을"



이스라엘 주장의 근거는 2,300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을 영토로 삼았기 때문이다. BC 587년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 2세에 의해 유대왕국이 멸망하면서 유대인은 유럽지역을 떠돌게 되었다. 이방인으로 핍박을 받으며 2,000년을 보낸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지역을 근거로 독립을 선언했다.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 는 로스차일드에게 이스라엘 독립을 약속하였고 시오니즘을 추종하던 일부에게 희망을 주었다. 이집트 주재 고등 판무관 '헨리 맥마흔' 은 아랍 지도자 알리 빈 후세인에게 팔레스타인에 아랍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영국이 중동지역에서 유대인과 아랍인을 모두 이용하기 위해 이중 계약을 맺으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2차대전이 끝나자 팔레스타인지역에서 독립을 선언했고 주변국인 이집트와 요르단, 시리아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소련의 무기 지원을 받고 있는 아랍 연합은 전력으로 앞섰지만, 이스라엘의 철저한 준비를 대비하지 못했고 4차 중동전쟁까지 패배를 맛보았다. 3차 중동전쟁인 6일 전쟁을 이끈 중심에는 국방장관 '모세 다얀' 과 참모총장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이 있었다.





이츠하크 라빈은 이스라엘 독립을 위해 전쟁에 적극 참여하였고 주미대사를 거쳐 노동당의 당수로 지명이 되었다. 1974년 총리에 임명된 라빈은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군을 철수했고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와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다.





수에즈 운하를 점거하고 있던 이집트와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수에즈 운하 통행권을 확보했다. 시오니즘을 주장하는 이스라엘 강경파들은 이츠하크 라빈의 행보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스라엘이 건설하는 대제국의 꿈을 라빈이 망쳤다고 주장했다.





총리에서 내려 온 라빈은 국방장관을 역임하고 재선거에서 1992년 총리 재선에 성공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링턴의 중재로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와 오슬로 협정을 맺으면서 평화의 바람이 불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인정하는 오슬로 협정에 대해 이스라엘 내 강경파와 극우단체는 극렬하게 반대했고 라빈의 암살을 조장하기도 했다. 측근들의 우려와 달리 라빈 총리는 동족인 유대인이 자신을 암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라빈 총리의 판단과는 달리 극우 강경파인 '이갈 아미르 (Yigal Amir)' 에 의해 암상되었다. 1995년 11월 4일 이후로 총리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된 라빈은 사망했고 뒤를 이은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는 중동 평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의사를 밝혔다.





중동 평화를 주도한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라빈이 총리가 되면서 독립 이후 중동지역 주변국과 전쟁을 불사하며 3차대전 지역으로 지목되었던 팔레스타인에 잠시 나마 평화의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전쟁 없고 나쁜 평화 없다" 는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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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