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8. 5. 4. 07:00


미국과 일본이 맞대결한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해전에서는 '미드웨이' 이고 육상전에서는 '이오지마' 입니다. 이오지마는 일본령 오가사와라 제도의 작은 섬으로 태평양 전쟁 막바지가 되면서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습니다.





대동아공영권을 앞세우며 아시아 주변국을 차례대로 침공한 일본은 한국을 거쳐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일본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부터 대륙 정벌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일본은 중국을 침공하기를 원했고 중일전쟁을 일으킵니다.



중일전쟁 중국군



노구교 다리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중일전쟁은 일본의 예상과는 달리 쉽게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혼란해 보이던 중국은 국공합작으로 맞섰고 일본의 많은 인력과 자원이 중국으로 향하면서 일본은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부족해진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인도차이나로 눈을 돌린 일본에게 필리핀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이 걸림돌이었습니다. 몇 번의 협상을 시도했지만, 미국은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고 일본은 빠른 시일 내에 유리한 입지를 가져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도조 히데키와 능력을 과신한 육군 장성들은 진주만을 기습하기로 결정하고 미국은 일본의 예상과 달리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예상과 다른 미국의 행보에 당황한 일본은 미드웨이에서 참패하면서 해군 전력을 대부분 상실했고 이성을 잃기 시작합니다.





전력이 약했던 미국을 상대로 소모전을 벌이며 시간을 소진하기로 했던 초기 계획은 사라지고 '반자이 돌격' 으로 무사도 기상을 보여야 한다며 일본군을 희생시켰습니다. 무타구치 렌야, 스기야마 하지메, 도미나가 교지가 삽질을 하면서 일본군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미드웨이 이후에도 기세가 꺾이지 않자 미군은 내심 초조해졌고 일본 본토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합니다. 중간 기착지가 필요했던 미국은 이오지마를 점령하기로 했고 일본은 본토를 바로 앞에 한 이오지마를 넘겨 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오지마에는 육군에서 비주류이기는 했지만 능력이 출중했던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이 사령관으로 있었습니다. 냉철하고 이성적이었던 다다미치는 반자이 돌격을 금지시켰고 10만인 넘는 미군 병력을 상대로 소모전을 벌이기로 결정합니다.





'디테치먼트 작전(Operation Detachment)' 로 명명된 태평양 전쟁 가운데 가장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은 이전과 다르게 미 해병대가 상륙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섬 중앙으로 유인했고 종심에 이르러 치열한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상륙하기 전부터 수개월 동안 함포를 쏟아부었지만, 일본군은 동굴 속에 숨어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반다이 돌격을 기다리는 미군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지금까지 미 해병대는 일본군이 벌이는 반자이 돌격으로 쉽게 전투에서 승리했고 이오지마를 점령하는 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1주일을 예상했던 이오지마 전투는 1달을 넘어갔고 미군 희생자는 예상보다 심각했습니다. 20,000에 달하는 일본군은 전멸에 가까운 수치를 기록했고 미군도 25,000에 달하는 사상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일본과 미국의 입장이 급격하게 변화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으로 부담을 느끼던 미국은 이오지마 전투로 일본군 소모전에 대해 위협을 느꼈고 일본은 미국을 상대하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이후에 벌어지는 태평양 전투에서 일본은 전적으로 소모전 양상으로 바뀌었고 미군 사상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됩니다.





이오지마 전투를 기점으로 미국은 태평양 전쟁을 빨리 마무리해야겠다는 전략을 수립하게 됩니다. 일본 본토를 핵폭탄으로 공격해야 한다는 '맨하탄 프로젝트' 가 힘을 얻었고 결과적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번의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기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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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