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4. 4. 28. 14:58

 

 

 

패전국 독일의 많은 지휘관은 전술과 전략적인 측면에서 명장이라고 불릴정도로 뛰어난 전과를 달성했습니다.

소련과 치뤄진 독소전쟁에서 많은 영웅들이 탄생했는데 그 중 가장 뛰어난 지휘관중 한명이 하인츠 구데리안입니다.

 

 

위대한 하인츠 또는 재빠른 하인츠라 불릴정도로 전선에서 위용이 대단했으며 독일 기갑부대의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이거에 이은 팬저의 활약이 구데리안의 업적이라고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자신이 고안한 전격전을 전선에 응용해서 많은 전과를 내주었고 히틀러에게 신임을 얻게되어 상급대장으로 진급을 하게 되었으며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으로 부상을 입은 쿨트 자인츠러 상급대장을 대신해서 육군참모총장에 오릅니다.

 

 

 

 

 

 

동료이며 포스트 육참총장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그렇게도 바라던 자리인데 만슈타인은 야전사령관으로만 이름이 높아졌고 구데리안이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분위기로서는 껍데기뿐인 육군참모총장의 자리를 모두 고사했고 하인츠도 몇번이나 고사했지만 어쩔 수 없이 앉게 된 자리라서 그렇게 영광스럽지는 않았지만 앉고 싶었던 만슈타인 입장에서는 부러운일었습니다.

 

 

폴란드 침공에서 선봉에서서 지휘를 했으며 프랑스 침공인 낫질작전의 핵심이었고 독소전쟁의 시발점인 바로바로사작전에도 참여해서 2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승리를 일구어 냈습니다.

 

 

 

 

 

 

모스크바 침공에서 많은 전력의 손실은 가져왔고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작전이 지연되기 시작합니다. 제2기갑군의 지휘관이었던 구데리안은 모스크바를 점령하기 위해 우회작전을 전개했고 귄터 폰 클루게원수와 겹치면서 작전이 실패하게 됩니다.

 

 

작전 실패의 원인을 찾고 있던 히틀러는 귄터 폰 클루게의 보고에서 구데리안의 잘못을 찾아내서 2기갑군 지휘권을 박탈합니다. 바바로사작전에 참여했던 많은 장성들이 그랬지만 6월에 시작된 작전이 길어지면서 12월을 넘기고 있었고 보급에 차질을 빚기 시작합니다.

 

 

보급선이 늘어지면서 독일군의 사기도 떨어져 히틀러에게 직접 후퇴를 건의하지만 이를 이유로 사령관직에서 사임을 하게 되고 야전 지휘권을 박탈 당하게 됩니다.

 

 

 

 

 

 

1943년 3월에 다시 구데리안을 불러들인 히틀러는 야전사령관이 아닌 기갑총감 자리를 내주고 모든 전선에서 고전하고 있는 기갑부대의 부활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힘을 쏟습니다.

 

 

히틀러의 광기가 극에 달하고 암살사건이 미수에 그치면서 패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시점에 육군참모총장에 오르고 전선에 대한 히틀러의 간섭을 저지하려고 자주 맞서게 되자 히틀러는 구데리안을 쫒아낼 궁리를 합니다.

 

 

이견을 가진 육군참모총장을 6주동안 휴가를 보내지만 이는사실상 해임을 의미하는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됐지만 무혐의로 풀려났고 미국 기갑학교에 초정되서 전술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기갑전술을 논할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중에 한명이 바로 하인츠 구데리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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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