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12. 21. 07:00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은 독일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를 오가며 청년시절을 보냈고 독일에 귀국하여 NSDAP(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 나치당) 를 접한 뒤 나치 친위대 'SS(Schutzstaffel,슈츠슈타펠)' 에 동참하게 됩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주창하는 게르만 전체주의가 아이히만의 마음을 이끌었고 반유대인 정책에 매료되었습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고 2인자 '하임리히 힘러' 가 부각되고 SS 보안방첩부 수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의 광기가 추가되면서 반유대 정책은 급격하게 확산되었고 홀로코스트는 정점으로 향하게 됩니다.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몰아넣는 것으로 광기를 보인 아이히만은 스스로가 유대인 인종에 대한 '최종 해결' 이라고 자부하였고 유대인 학살 계획 "라인하르트 작전" 에 최선봉에서 서게 됩니다. 500만 명에 육박하는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면서 악명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가 "유인원 작전" 으로 사망하고 패망이 다가오면서 유대인 학살을 중지하라고 지시한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을 무시하면서 유대인 학살에 매달리는 아이히만은 악마 자체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때 힘러는 "독일에게 아이히만 50명이 있었다면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것입니다" 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나치 무장친위대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힘러로부터 칭송을 들었던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을 선도한 것에 대한 치하로 철십자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온갖 만행을 저지르던 아이히만은 독일 패망이 다가오자 수용된 미군 수용소에서 신분을 위조해서 사용하였고 퇴역 군인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면서 탈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친위대 동료들 도움으로 아르헨티나로 도망가게 된 아이히만은 신분을 숨기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히카르도 클레멘스' 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15년동안 도피생활을 유지했고 독립한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을 쫒기 위해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들을 전세계에 급파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막무가내로 활동하는 모사드이지만 아이히만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기억 속에서 아이히만이 지워질 즈음 모사드는 아르헨티나에서 가명을 사용하며 도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르헨티나로 날아갑니다. 홀로코스트 주범이었던 아이히만을 체포하기 위해 신중하게 확인 작업을 거쳤고 마침내 체포에 임박합니다.





외모를 감춘 아이히만을 면밀하게 관찰하기 위해 모사드 요원들은 사진을 찍어 신분을 확인하였고 체포한 뒤 이스라엘로 압송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하임리히 힘러' 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가 명령한 것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아돌프 아이히만' 은 유대인에게는 악마같은 존재지만 아이들에게 포근한 아버지였고 충실한 남편이었으며 성실한 이웃이었습니다. 독일인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재판부는 아이히만 변호를 맡은 외국인 변호사 금지법을 개정하면서 재판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아이히만은 최종 판결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마지막까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홀로코스트에 직접적인 관여가 없었다고 항변하였습니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아돌프 아이히만' 을 모사드는 어떻게 찾아낸 것일까?





아이히만의 큰아들 '호르스트 아이히만' 은 유대인 여자친구에게 자랑삼아 "아버지가 홀로코스트를 직접 주관했다" 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의심을 사게 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통해 소식을 들은 모사드가 아이히만을 2년동안 추적하여 덜미가 잡힌 것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을 끝까지 추적한 모사드 명성이 세계적으로 울려퍼지게 되었고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댓가를 치른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를 몸소 실천한 단적인 예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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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