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7. 16. 07:00


노르망디를 기점으로 상륙 작전을 구상한 워싱턴은 구상 자체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연합군 최고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성공해주기만을 바랬습니다. 지상군 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조지 패튼이 함께 했지만 확신할 수 없는 작전이었습니다.


연합군은 이미 디에프에서 상륙작전을 펼쳐 본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캐나다와 영국군 6,000명 중에서 1,000여 명이 전사하고 2,300여 명이 포로가 되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중심이 된 코만도부대의 활약은 눈부셨지만 후속부대의 부진으로 실패한 작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



1944년 서부전선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상부의 압력은 날로 심해졌고 오버로드 작전에 대한 구상이 구체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합니다. 여름을 넘기지 않고 작전을 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연합군 지휘부는 불가능한 작전에 진척이 될 리 없었습니다.


독일군은 노르망디와 칼레에 상륙작전을 펼칠 것을 예상했고 북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에르빈 롬멜을 노르망디의 사령관으로 배속했으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도 해안 전선에 파견했습니다. 도버 해엽을 건너기 위해서는 독일 해군의 눈을 절대적으로 피하는 숙제도 있었습니다.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



대서양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칼 되니츠의 U보트 전단이 나타나면 노르망디에 다다르기도 전에 수장될 수 있는 위험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오버로드 작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변수와 부정적인 면모는 성공과는 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헤르만 괴링의 루프트바페도 전력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막강한 전력이었고 지휘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머리를 아프게 했습니다.





서부전선의 지지부진한 성과와는 다르게 동부전선의 붉은 군대는 파죽지세로 독일군을 몰아내고 있었고 발칸 지역까지 점령하면서 빠른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방어전에 능숙한 발터 모델이 대공세를 펼치고는 있었지만 날로 성장하는 소련군의 기세는 등등했습니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성장세의 소련군이 유럽을 공산화시킬 것에 대한 우려가 상당히 컸습니다. 전선에서 영향력이 날로 커져가는 소련군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야욕을 알고 있었고 저지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전선의 상황을 극적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오버로드 작전이 안성맞춤이었고 기상악화를 이유로 미적대고 있는 야전 사령관들에게 질책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지휘관들도 기상 관측관을 통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수시로 점검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날아왔습니다.





예정된 날짜가 되도록 기상은 좋아지지 않았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사령관은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공산화를 두려워한 영국과 미국의 정치가들의 날로 심해지는 압박에 한계를 느꼈고 강행을 주장하는 지휘관들도 늘어갔기 때문입니다.


벼랑에 몰린 연합군 지휘부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없었고 악화된 기상 상황에서 최적인 6월 6일을 디데이로 택하게 됩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오버로드 작전은 기만 작전과 병행되어 유타, 오마하, 소드, 골드, 주노에서 일사분란하게 벌어졌고 많은 전사자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초기 목표인 셀부르와 캉을 탈환하였고 거점을 확대하면서 서부전선의 상황을 완벽하게 바뀌어 놓았습니다. 실패에 가까운 위험을 감수한 오버로드 작전으로 서부전선은 빠르게 연합군의 품으로 돌아왔고 소련의 진격도 견제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공산화가 두려워 서두른 오버로드 작전이 2차대전을 전환하는 신의 한 수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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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