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6. 13. 07:00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을 맞이한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을 하면서 국군이 창설되었습니다. 육해공군이 모두 창설되었지만 제대로 된 체계가 갖추어지지도 않았으며 장비의 수준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기에 임무를 수행하기에 부적격한 군대였습니다.


해군은 군함으로 쓸만한 함선이 전무했고 일제가 패망하면서 건조하다가 남기고 간 배를 기술진을 모아 진수한 '충무공정' 이 유일했습니다. 경비정 수준의 충무공정은 함선으로서는 첫번째에 이름을 올렸지만 해전에 나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손원일 제독과 수병들은 해군 전투함의 필요를 강력하게 피력하였으나 정부는 함선을 건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미국은 원조에 소극적인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2차대전으로 전쟁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되어 있었고 미 행정부는 동아시아 정세에 무지했습니다.


손원일 제독은 장교들과 수병에게 협조를 구했고 "함정건조기금거출위원회" 를 구성하여 전투함을 구비하기로 결정합니다. 장교의 월급 10%, 병조장 7%, 수병 5%의 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해군 배우자들은 삯바느질로 기금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손원일 제독의 아내 홍은혜 여사가 중심이 된 '해군 부인회' 는 바자회를 열어 기금을 마련했습니다. 4개월만에 15,000달러가 모아졌고 정부에서 지원한 45,00달러를 들고 전투함을 구매하기 위해 손원일 제독과 장교들은 미국행에 몸을 싣게 됩니다. (전무후무한 역사다...)


미국에 도착한 해군 장교들은 함선의 비용이 엄청난 것을 알았고 2차대전에서 사용하던 PC-461급 중고 구장함을 구입하기로 결정합니다. PC- 461 구장함은 미국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전력은 아니었고 동맹국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해군 실습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2차대전에서 U 보트 1정을 격침한 전력이 전부였지만 대한민국에게는 커다란 자산이 될 것을 예상했습니다. 엔진만 살아남은 화이트헤드(USS PC-823)를 15명의 장교들이 숙식을 해결하면서 복구했고 하와이에 들러 3인치 포를 장착하고 괌에서 100발의 포탄을 구입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2개월 전에 한국에 도착한 화이트헤드 전투함은 "백두산함(PC-701)" 으로 명명되었고 초대 함장은 박옥규 중령이 임명되었습니다. 포탄이 100발에 불과했기 때문에 입항 후 제대로 된 훈련을 할 수도 없었으며 5발의 연습 사격만 거쳤습니다.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육군은 파죽지세로 밀려내려오는 인민군을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1달안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호언장담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을 설득했던 김일성은 후방으로 특수부대 육전대를 투입하였습니다.


후방을 교란하여 빠르게 전쟁을 마무리하겠다는 계획으로 600명의 육전대를 태운 수송선은 부산으로 향했고 이를 감지한 백두산함은 최초로 출항을 결정합니다. YMS-512 구월산정과 YMS-518 고성정과 함께 출항하여 북한 선박을 발견하고 교전에 들어갑니다.





포탄이 모자라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근접거리인 400m까지 접근하였고 정확한 타격을 위해 신중을 기했습니다. 적선박에서 대응 사격을 시도했고 근접한 백두산함의 조타실이 타격을 입게 됩니다. 20발을 포격한 3인치 포는 스프링이 늘어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기관총으로 응사한 백두산함의 승조원들은 600명의 육전대를 태운 적함을 수장시켰고 최초의 승전을 기록하게 됩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노만 존슨은 "백두산함의 승리는 한국전의 분수령" 이었다는 언급을 했을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으며 중심에는 대한민국 해군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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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