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5. 28. 07:00


소련군 군정하에 있던 김일성은 남침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고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전차와 전투기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스탈린은 2차대전으로 인한 피로가 가시지 않았고 남한의 미국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48번이나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락해 달라는 철없는 김일성의 요구가 스탈린은 부담스러웠고 애치슨라인이 발표되었다는 이유로 고무된 상황을 넘길 수만은 없었습니다. 소련은 중국과 협의에 이르렀고 남침을 계획한 김일성의 요구를 허락하게 됩니다.





한국전쟁 발발 후 3일 동안 파죽지세로 남침하던 김일성은 계획대로 진행되는 전장의 상황에 힘을 얻었지만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4일 째부터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춘천을 거쳐 집결하기로 한 병력이 도착하지 않으면서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에 참전을 결정한 UN의 허락이 떨어지자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병력이 빠르게 상륙했습니다. 각종 장비를 가진 미 해병대는 상륙과 함께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도로가 정비되지 않았고 산악지형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전차와 대포를 운용하기에 부적합했고 보급로를 개척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제 1 해병사단 5연대 에릭 패더슨 중위는 2차대전이 벌어진 유럽 대륙을 상기하였고 새로운 운송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패더슨 중위는 서울에 위치한 경마장에서 "아침 해"로 명명된 경주마를 구입하게 됩니다. 250달러를 주고 구입한 경주마를 운송수단으로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던 패더슨 중위는 군용으로 말을 사용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리에 예민하고 발목이 얇아 산지에 약한 경주마가 제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침 해" 는 상식을 깨운 말이었습니다. 산 위로 포탄을 운송할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미 해병대에게는 단비와 같은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이름 "레클리스(reckless)" 로 명명된 군마는 겁이 없었고 머리가 뛰어나 한 번 가르쳐 준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M20 75mm 무반동총 부대에 배속된 레클리스는 총에 맞을 확률이 4배나 높은 말이라는 통계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전장에서 대활약을 펼칩니다. 총탄과 포탄 소리에 겁을 먹지도 않으며 총탄이 날아오면 엎드려서 피하였고 포탄이 날아오면 벙커로 피할 정도로 영특했습니다.


길을 외워 혼자서 포탄을 나르는 것을 물론이고 병사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전장에서 전투를 벌이며 미 해병대의 사기를 드높이게 됩니다. 레클리스의 활약에 해병대원들은 환호했고 같이 숙소에 잠을 잤으며 맥주를 나누어 마시기도 하면서 전우애를 쌓게 됩니다. (명마이다...)





1953년 미 제 1해병대와 중공군 120사단은 연천전투를 벌였고 레클리스는 산 위로 51번을 오가며 4,000kg에 달하는 포탄을 공급했습니다. 레클리스의 활약에 미 해병대원들은 감동으로 전율을 느꼈고 전역한 해럴드 워클리 병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레클리스를 언급했습니다.


"포탄이 비오듯이 떨어지는 전장에서 연기와 화염 속 새벽 여명에 비친 레클리스의 실루엣을 보고 감동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레클리스에게 계급이 주어지는 것을 물론 한국전쟁이 끝나고 콴티코 미 해병대 기지로 돌아가는 길에 레클리스도 함께 했습니다.


여권과 비자가 없은 레클리스의 사연을 들은 미 해병대 사령관은 농림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을 찾아가 특별한 예외로 레클리스의 입국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콴티코 기지에서 해병대원들과 생활하면서 중사까지 진급하였고 퍼플하트 훈장 2개와 2개의 훈장을 추가로 수여받았습니다.





전역할 때까지 해병대의 영웅으로 추대되었으며 전역식을 치르는 것은 물론 1968년 생을 달리했을 때 부대장을 치러 레클리스의 영혼을 기렸습니다. 2013년 버지니아 미 해병대 박물관에 레클리스의 동상을 제막하였으며 한국전에 참전한 동료들이 모여 영웅담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