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5. 13. 07:00


진주만을 기습 공격 당하기 전까지 미국은 2차대전에 참전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1차대전에서 유럽에서 치른 희생이 너무 컸고 경제적인 손실과 미국 내 반전 여론이 집행부가 참전하는 것에 부정인 이유로 작용하였고 침체된 경제상황도 걸리돌이었습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이라는 정책을 내놓았지만 성공적인 정책이 될 수 없었음을 알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뉴딜 정책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지만 2차대전이 없었다면 실패한 정책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원이 부족한 유럽의 독일과 영국에게 물자를 공급하면서 경제적인 부를 쌓았고 태평양에서는 필리핀을 위시로 한 영토 확장에 안착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길어진 중일전쟁으로 인도네시아의 자원이 급하게 필요했고 잠자고 있는 미국의 수염을 뽑게 됩니다.


해군력에서 자신있던 일본의 군부는 미국이 참전하면서 스스로의 판단이 확실히 빗나갔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앞선 경제력을 모두 군수산업으로 돌린 미국의 생산 능력은 일본이 예상한 것과 수치를 가늠할 수 없는 차이를 보일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전시 체제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유럽과 태평양에 필요한 물자를 모두 공급할 수 있었고 일본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게 됩니다. 군사력 뿐 아니라 위대한 엘리트 지휘관들의 전술에 매 번 참패를 겪으며 호령하던 태평양에서 서서히 밀려나는 형국이었습니다.


남서태평양 지역에는 육군 원수 더글라스 맥아더가 있었고 태평양 대양에는 함대 최고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과 니미츠 제독은 태생부터 확실하게 차이를 가지고 있었고 지휘하던 육군과 해군도 서로가 대립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뿌리부터 금수저로 미국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실력으로 마쳤고 근성을 지닌 지휘관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독선적인 성품으로 부하들에게 존경을 받기는 했지만 상부의 지휘계통을 흔들어대는 통에 많은 내부의 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맥아더의 휘하에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조지 S. 패튼이 있을 정도였고 정치적인 마찰을 빚으며 현역에서 물러났다가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태평양 전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초기 태평양 전투에서 일본에게 패배하며 "알뷔 백"으로 외치며 퇴각하였습니다.





타라와 전투를 통해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온 맥아더 장군은 서남태평양에서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였고 인도네시아 인근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들 격퇴하게 됩니다. 대부분이 섬인 태평양에서 상륙작전을 이끌며 노하우를 쌓게 되면서 미국이 벌이는 상륙작전의 교본을 마련하게 됩니다.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는 독일계 출신으로 흑수저이지만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기를 희망합니다. 웨스트포인트에는 자리가 나지 않았고 하원 의원 제임스 슬레이든은 해군에 자리가 있으니 지원해보라고 조언하여 니미츠는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합니다.


잠수함과 디젤엔진에 관심이 많았고 사교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어 부관들과 자주 교류를 하였고 상대적으로 스펙트럼이 넓은 군인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뼈 속부터 군인이기에 오롯이 자신의 길을 걸었고 진주만에서 무너진 태평양함대를 일으키는 데 공헌하게 됩니다.



USS 미주리호에서 사인하는 니미츠 제독



휘하의 지휘관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항공모함을 주축으로 진행된 니미츠의 전술은 현대전까지 계승되고 있습니다. 산호해, 미드웨이, 솔로몬 해전, 레이테 만 해전을 입안해서 승리로 이끄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며 전설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항복문서에 사인하는 맥아더 장군



빗발치는 총탄 세례를 받으면서도 꼿꼿하게 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육군과 치밀하고 자율적인 분위기의 체스터 니미츠 제독 해군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게 승리를 안겨 준 양대산맥으로 불리웁니다. 니미츠 제독은 해군원수로 진급하는 영예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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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