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5. 2. 07:00


1차대전의 패전으로 경제적인 압박을 받고 있던 독일은 연합군에서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졌습니다. 승전국들이 정한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해 일정 이상의 병력과 군비까지 제한 받으면서 팽배해진 불만은 민족주의와 함께 불처럼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언변가는 독일 순혈주의를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앞세우면서 스스로가 독일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게 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승전국의 예상과는 달리 급속한 경제회복을 이루었고 배상금을 예상보다 빨리 갚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배상금을 줄 생각이 없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력의 급성장에 당황했고 군비확충이 끝나기도 전에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1차대전에 대한 트라우마가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전쟁이 발발할 위험에 처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당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를 달래기에 급급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를 두려워했던 히틀러는 영국과 독일이 이전의 강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2차대전을 일으켜도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기병부대를 앞세운 유럽의 육군력은 경전차와 루프트바페의 급강하 폭격기 수투카를 앞세운 독일의 전격전에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동부전선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러시아와 불가침 조약까지 먼저 맺은 상황에서의 독일은 유럽에서는 최고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자 동맹으로 조약을 맺은 이탈이아와 아시아의 일본이 자신들의 몫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프랑스 침공을 계획하게 됩니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놓인 마지노선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져 있었기에 독일 육군을 긴장하게 했지만 1차대전에서 시도했던 우회작전이 거론되었습니다. 중앙집단군을 지휘하던 전격전의 선봉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히틀러의 귀를 솔깃하게 했습니다.





벨기에를 우회하여 프랑스를 침공하는 작전은 이미 1차대전에서 알프레크 폰 슐리펜 원수가 입안했기 때문에 육군 장성들은 실패한 작전을 재입안하는 데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슐리펜 작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프랑스도 예상할 수 있는 뻔한 작전은 위험이 컸습니다.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 은 프랑스가 슐리펜 작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아르덴으로 진격하는 변칙을 응용했기 때문에 가능성은 확실히 높아졌습니다. 만슈타인의 예상은 제대로 맞아 떨어졌고 히틀러의 우려와는 다르게 프랑스를 6주만에 점령하게 됩니다.





침공을 당한 프랑스보다 충격을 받은 것은 영국이었고 혼비백산한 영국군은 모든 장비를 내버리고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 본토로 돌아가게 됩니다. 유럽에서 다시 전쟁을 일으키기 싫었던 영국은 자신들의 영토가 섬이라는 것에 안도하며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독일 육군 장성들은 도망치는 영국군을 추격하여 주력 전력을 타격하여 유럽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하자고 주장했으나 히틀러는 꽁무니를 보인 영국군을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섬나라인 영국이 유럽 전장에서 관여하지 않기를 내심 바랬던 히틀러는 영국 수뇌부를 자극하기 싫었습니다.





영국을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은 후일 독일이 패망하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고 히틀러도 이를 두고 내심 크게 후회를 했다고 합니다. 히틀러가 영국을 두려워해서 추격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하지만 육군에 비해 현격하게 모자란 해군의 입지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


해군력에서만은 세계 최고의 수준을 갖추고 있는 영국을 독일이 추격하거나 공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을 히틀러는 잘 알고 있었고 해군 사령관 칼 되니츠와 육군 원수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잠잠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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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