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4. 9. 07:00


1차대전으로 피폐해진 독일은 엄청난 전쟁 배상금과 금수조치를 담은 바르세유 조약에 합의했고 오랜 시간 굴욕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리아인의 우수함을 주창하면서 대중들에게 어필하던 연설가는 나치당의 총수가 되었고 은밀하게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전차를 제작했으며 병사들을 길들였고 권고한 세력을 마련했습니다. 해군 사령관은 U 보트로 명성을 가지고 있던 칼 되니츠가 맡았고 공군 루프트바페는 사령관 헤르만 괴링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선전부 장관은 요제프 괴멜스가 맡았습니다.





히틀러를 추종하던 육군 지휘관들은 2차대전에 대해 적극적이었고 독일의 재건을 희망했습니다. 선량하고 현실적인 독일 국민까지 나치당의 어필에 협조하였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공감을 했습니다.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대전은 파죽지세였고 독일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듯 했습니다.


히틀러를 보좌하는 무장친위대 SS와 비밀 경찰 게쉬타포의 수장에는 하인리히 루이트폴트 힘러(Heinrich Luitpold Himmler)가 임명되었습니다. 정통 아리아인이며 바이에른 주 뮌헨 출신의 힘러는 히틀러의 뒤을 이을 2인자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무장친위대와 게쉬타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기관이었고 하인리히 힘러는 거칠 것이 없는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나치당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280명에 불과했던 친위대 인원을 200만 명까지 늘렸고 무장친위대는 90만 명에 달했습니다.


연합군은 독일군이 포로가 되면 정당한 대접을 해주었지만 전장에서 무장친위대를 체포 즉시 사살하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친위대가 유태인과 공산주의자, 집시, 동성애자를 수용소에 가두고 집단 학살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자행했다는 것이 전장에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홀로코스트를 설계한 인물 중에 한 명이 하인리히 힘러였고 1천명에 달하는 유태인을 학살했습니다. 강제수용소에서는 생체실험을 자행했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했으며 독일의 공무원들은 친위대가 자행하는 만행에 대부분을 방조하거나 동조하였습니다.


홀로코스트를 설계하고 자행한 나치의 수뇌부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통해 판결을 받았지만 독일 국민 대부분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 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재무부는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기업들은 유태인을 해고하고 권리를 박탈했습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고 힘러는 내무장관에 임명되었고 비서실장 마틴 보르만과 갈등 관계에 놓이면서 히틀러와 틈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권력을 자신의 손에 넣고 싶은 힘러는 경찰 전체에 대한 실권을 쥐려는 욕망을 내치쳤고 마틴 보르만이 히틀러에게 귀뜸을 했기 때문입니다.


묘한 기류가 흐르던 차에 히틀러 암살 작전 "발키리"가 자행되었고 육군 사령관 루트비히 베크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이 연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하인리히 힘러에게 전권을 부여하게 됩니다. 힘러가 무장친위대를 무자비로 늘리면서 독일 육군은 몰락을 맞이하게 됩니다.





총통의 후계자로 거론이 되었지만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면서 힘러는 연합군과의 협상을 시도했고 마지막까지 항전을 외치던 히틀러에게 반역자로 판명되어 직위를 해제 당하게 됩니다. 연합군을 피해 해군 사령관 칼 되니츠에게 숨어들었다가 도주 중 체포되어 영국군 사령부로 압송되었습니다.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수색하던 부관의 눈을 피해 입에 물고있던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어 자살하기에 이릅니다. 총통 아돌프 히틀러보다 잔혹한 행보를 걸으며 스스로가 악인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하인리히 힘러는 화장되어 강에 뿌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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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