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4. 5. 07:00


심해를 잠수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넘쳐나면서 각 국에서는 잠수정에 대한 개발이 이어졌지만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증기선을 개발한 로버트 풀턴은 당시로서 가장 실용적이며 잠항성능을 겸비한 노틸러스를 디자인하고 개발하였습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던 시기 최초의 군용 잠수함 "터틀"이 개발되었고 실전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페달을 돌려 동력을 일으켰고 적함에 구멍을 낼 수 있는 드라이버가 장착되어 있어 목재선에 구멍을 내고 폭약을 설치하는 1인 잠수정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했습니다.


잠수함은 대부분의 공격에는 실패를 하면서 비신사적인 무기로 평가되었고 인식이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1866년 화이트 헤드가 어뢰를 개발하면서 잠수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1차대전에서 독일은 U보트를 운용하게 되어 잠수함전에 대한 개념을 터득하기에 이릅니다.





잠수함이 엄청난 위력의 전력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은 2차대전 독일 해군 사령관 칼 되니츠가 U보트를 전력에 운용하면서였습니다. 유럽의 대부분이 독일에 의해 침공 당했고 섬나라인 영국은 U보트의 활약으로 상선의 물자를 공급받을 수 없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상선을 한꺼번에 집결하여 항해하는 방식을 택했으나 칼 되니츠는 이리떼 작전으로 영국의 방책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U보트의 위용이 커지면서 잠수함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고 태평양전에 참전한 미 해군도 잠수함전에 요구가 높아지게 됩니다.





독일에게 U보트가 있었다면 미 해군에게는 가토급 잠수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토급(Gato Claass)" 또는 "게이토"로 불리우는 주력 잠수함은 U보트의 성능에 못지 않았으며 태평양전에서 미 해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새로운 전력으로서의 기대감을 갖게 했습니다.


24문의 어뢰와 40발의 기뢰로 무장을 했으며 12.7mm 기관포에서 20mm M2 중기관총을 부무장으로 택했습니다. 미 해군은 진주만 기습작전으로 적대감이 높아져 있었고 욱일승천기가 달려 있는 일본 함정을 발견하면 즉시 어뢰를 발사했습니다.





참전 초기부터 일본 함정을 추적하고 공격하는 임무에 다양하게 참전하였으나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가토급 잠수함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MK14 어뢰의 뇌관이 잘 터지지 않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었고 2차대전 말기가 되어서야 뇌관이 개량되면서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참전 초기부터 개량되기 전까지의 공격 성공률이 뇌관을 개량하고 나타난 공격 성공률에 비슷한 수준으로 상승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MK14 어뢰의 수준이 상당히 진보적이었다면 U보트 못지 않은 활약을 태평양에서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디젤엔진과 전기모터로 구동하는 구형 잠수함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소음으로 발각이 쉽지 않았고 잠항시간이 길었습니다. 선체가 크고 공간이 많아 수병들에게는 좋았지만 잠항속도가 늦었고 잠항심도가 90m 밖에 되지 않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U보트 잠항심도는 250mm였다고 한다. 역시!!)


잠항심도는 폭뢰공격에 맞서야 하는 잠수함으로서는 생존에 영향을 주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나와 지상 레이더를 겸하고 있었으며 에어컨과 세탁기, 냉장고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소나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에어컨을 끄면 온도가 40도를 웃도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잠수함 구조적인 문제보다도 심각한 것은 지휘관들이 잠수함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깊지 않았기 때문에 의견 일치가 힘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함장과 부함장이 의견이 갈라져 자주 언쟁을 벌였고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수병들의 사기를 저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태평양에서 많은 활약으로 U보트의 명성을 능가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독일과 같은 치밀한 면이 없었다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전력이 안정되면서 대서양에에 펼쳤던 U보트의 이리떼 작전을 응용하여 실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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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