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3. 15. 07:00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일본이 아시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동아공영권을 소리 높여 외치게 되었고 많은 국가가 전쟁의 화염속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전부터 중국을 차지하고 싶었던 일본의 야욕이 발동했지만 쉽지 않은 전개가 펼쳐집니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듯이 태평양에서는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시간이 지체되면서 자원은 바닥나게 되었고 새로운 자원조달 식민지가 필요했던 일본은 인도차이나에 눈독을 들이게 됩니다.





영국령의 인도와 이름도 없었던 네덜란드령의 인도네시아의 많은 물자와 인력이 필요했던 일본은 가쓰라 테프트 조약으로 발목이 잡히게 된 필리핀을 침공하기 위해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앉기를 희망합니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군수물자를 팔면서 이익을 챙기고 있었고 전장에 뛰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실리주의자였고 의회와 각료들도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급해진 일본은 협상테이블에서 유리한 고지에 오르기 위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게 되었고 일본 장성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워싱턴은 참전을 결정하게 됩니다.





일본에게 기습공격을 당했다는 소식이 미국내에 퍼지면서 전쟁 참전에 대한 여론의 수위가 상당히 높아졌고 해리 트루먼 대통령도 무시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해군력에서 미국을 압도했던 일본은 미국의 참전을 신경쓰지 않는 듯 했으나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필리핀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의 의도대로 진행이 되지 않았으며 미드웨이에서 주력 항공모함인 아카기, 카가, 소류, 희류를 잃으면서 급격하게 전세가 기울게 되었습니다. 승기를 잡은 미국은 제공권까지 제압하면서 일본 본토를 향했고 주요 거점을 폭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던 1945년 여름, 소련이 일본을 넘보면서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했고 미국을 제치고 일본을 점령하려는 의도를 내보입니다. 대한민국도 9월부터는 세력이 약해진 일본에 직접적으로 대항하여 전투를 벌일 것을 통보했고 일본은 사면초가에 이르게 됩니다.


일본 군부와 천왕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일부의 뜻에 떠밀려 여전히 전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미국은 일본 내에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합니다. 우라늄과 플루토늄의 위력을 이미 알고 있던 미국은 빠르게 전쟁을 끝낼 것을 고민하게 됩니다.





히로시마, 교토, 고투라, 나가사키 ,도쿄를 선정하여 폭탄을 투하할 것을 고려했고 마지막으로 일본에게 항복의 메세지를 보내게 됩니다. 무조건적인 항복을 전달한 미국에게 일본은 조건부 항복을 시사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협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됩니다.


미국은 항복과 동시에 군대 해산권, 전범재판, 일본 점령금지를 주장하는 일본을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맨하탄 프로젝트를 계획한 미군 장성들과 관계자들은 최후 통첩을 보내게 됩니다. 조건없는 일본의 항복만이 미국의 제안이라는 뜻을 분명히 밝히게 되고...


되돌아 온 일본의 대답 "노코멘트..."





일본이 전달한 한마디를 미국은 부정의 의미로 받아들였고 이놀라 게이에 리틀보이를 싣고 히로시마에 떨구었고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을 결사항전을 외쳤고 3일 뒤 나가사키에 팻 맨이 다시 떨어졌고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합니다.


일본이 미국에게 전달한 노코멘트는 사실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잘못했습니다...!!" 라는 의미였고 결사항전을 외친 것도 일부의 주장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전 후 미국의 폭격이 논란에 휩싸이게 되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성명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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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