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3. 13. 07:00


세계 2차대전의 중심에 서있던 일본은 태평양의 대부분의 나라를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미명 아래 식민지로 만들었고 떨어져가는 석유와 목재를 구하기을 위해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인도차이나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고 유럽전장으로 전력이 모두 이동한 상황이었습니다.


무주공산의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필리핀을 우선적으로 거쳐야 하는데 이미 일본은 가쓰라 테프트 조약에 의거해서 대한제국을,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에 합의했기 때문에 대단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미국에게 협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태평양 전장에서 해군력의 우위를 가지고 있던 일본은 미국을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이기 위해 진주만을 공격하게 되었고 일본 군부의 예상과는 다르게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참전을 결정하게 됩니다. 길어진 태평양 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일본에게 더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일본 군부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고 미국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면서 전면전에 접어들게 됩니다. 경제력을 모두 군수물자를 만드는 데 집중하면서 미국은 급격하게 군사력을 키웠고 태평양 전장에서 일본을 압도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미드웨이해전에서 일본이 자랑하던 주력 항공모함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를 잃게 되고 전세는 미국쪽으로 급변하게 됩니다. 제공권까지 제압당한 일본은 본토 공습을 허용하게 되었고 태평양의 많은 전략적 요충지를 빼앗기면서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전세가 기울어지기는 했지만 일본은 결사항전을 외쳤고 카미가제 특공대로 미 해군의 항공모함을 공격하는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유럽과 태평양에서 전투를 벌이던 미국은 길어지는 전장에서 일본에게 한 방을 먹일 기회를 옅보게 되었고 워싱턴의 각료들은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합니다.





수개월에 걸쳐 원자폭탄의 투하를 검토하며 투하지를 물색하던 미국은 군사요충지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교토, 고쿠라를 유력지로 선정하게 됩니다. 히로시마는 많은 군수공장이 위치한 전략적이 가치가 있는 도시로 첫번째 타켓이 되었고 원폭투하에 앞서 미국은 일본에게 항복을 권유하게 됩니다.


패전의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일본 군부는 전쟁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고 미국의 군유를 무시하고 자국군을 전장으로 내몰며 충성을 강요했습니다.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싣고 일본 본토로 향한 이놀라 게이 B-29 전략폭격기에는 비장함이 감돌았고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습니다.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되었고 히로시마의 외관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엄청난 심리적 타격을 입었을 것으로 예상한 미국은 일본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예상했지만 일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고 미국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엄청난 폭발을 목격한 미국조차도 원자폭탄에 대한 위력에 내심 놀라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일본은 전쟁의 의지를 꺾지 않았고 마련했던 두번째 목표로 플루토늄 팻맨을 실은 벅스카 B-29를 출격시켰습니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리고 3일이 지난 1946년 8월 9일 아침...





두번째 목표는 고쿠라였고 B-29 편대는 순조로운 운행을 기대했지만 일기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쿠라 일대가 구름으로 70%가 가려져 목표를 제대로 판단을 할 수 없었고 지휘관은 기수를 돌려 나가사키로 향했습니다. 고쿠라에 투하가 안될 때 마련한 플랜B가 나가사키였기 때문입니다.





아침 11시 나가사키는 플루토늄으로 초토화되었고 일본 군부는 세번째와 네번째 핵공격 맨하탄 계획이 수립된 것을 알게 되었고 천황 히로히토는 무조건 항복을 미국에게 전달합니다. 태평양에서 위세등등하던 일본이 패망하게 되었고 미국의 군정으로 편입하게 된 것입니다.


미주리 전함에서 치뤄진 항복서약에 사인이 이루어지고 1945년 8월 15일은 아시아의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됩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의미가 없지만 벅스카가 고쿠라를 향해 날던 그날 일기가 나쁘지 않았다면 플루토늄 팻맨의 희생지는 나가사키가 아닌 고쿠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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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