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2. 28. 07:00


2차대전을 일으킨 나치당은 아돌프 히틀러의 전쟁 야욕 아래 유럽 전역을 포화로 뒤덮히게 만들었고 부흥을 이어나가던 유럽에 경제적, 정치적, 인도적인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전후 이를 지적하기 위해 전범들의 재판이 열렸고 독일은 지금까지도 그 날의 일은 반성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상당히 치명적인 오류를 남겼지만 군사기술적인 측면에서는 급격한 발전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히틀러가 주도하던 대부분의 군사 무기 기술은 현세대까지 영향을 미쳤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전설이기도 합니다.






타이거 탱크


중부전선에서 소련군과 맞선 전격전의 독일 기갑전력은 새로운 MBT(Main Battle Tank, 주력 전차)의 필요성을 상부에 전달하게 되었고 히틀러는 이에 크게 공감하게 됩니다. 소련 T-34에 앞선 전차를 만들기 위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왔고 6호전차 타이거에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중전차라는 개념 없었던 시절에 출연한 타이거 탱크는 연합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연합군의 기갑전력은 타이거 탱크의 노리개로 전락했습니다. 미하일 비트만과 같은 에이스들은 최고의 무기를 제 손 다루듯이 다루었고 88mm 주포는 현 세대의 전차들에게 영향을 주기까지 합니다.





메서슈미트 Bf 109 전투기


육군을 주력으로 생각하던 아돌프 히틀러는 공군 전력은 2인자 헤르만 괴링에게 모두 일임했고 괴링은 전쟁 초기 우수한 전투기를 바탕으로 루프트바페의 에이스들을 수도 없이 양산하는 아카데미가 되었고 유럽 제공권을 선점하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중심에는 메서슈미트사의 Bf 109가 있었고 연합군의 전투기를은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폭격기 우선주의의 연합군과는 다르게 전투기를 활용한 전술에 능했고 영국이 슈퍼마린 스핏파이트로 맞섰지만 전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합니다. 1944년 수적으로 우세한 연합군에게 제공권을 내주기 전까지 유럽 상공은 Bf 109의 것이었습니다.






MG-42 기관총


2차대전 초기부터 독일군은 MG 34라는 시대의 역작을 보병 지원화기로 사용하였고 속수무책의 연합군은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양한 전장의 환경에 적을 할 수 있는 신뢰성을 가지고 있었고 달궈진 총렬을 바로 교체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교하다 못해 오버스펙이라고 평가되기도 하는 MG-34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내구성을 강조하면서 복잡해진 구조 덕분에 대량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됩니다. 이를 보완한 것이 MG-42이고 시대의 명품으로 활약하려고 했지만 이미 전선은 연합군의 것이 되었습니다.






유 보트


해군사령관이며 히틀러 사후 독일의 국가대통령 칼 되니츠는 1차대전의 경험을 살려 유 보트 선단을 구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대서양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보급선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도 "내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유 보트 뿐이다" 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리떼 작전을 입안하면서 유 보트의 두려움은 더욱 커지기만 했지만 단점이 연합군에게 노출되기도 했습니다. 잠항시간이 길지 않아 반드시 부상을 해야 했던 유 보트의 치명적인 단점을 간파한 연합군은 제공권 우위의 급강하 폭격기로 유 보트의 활동을 제한하며 유 보트는 명성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판저파우스트


최초의 대전차포를 불리우기도 하는 판저파우스트는 현세대의 대전차포의 기원이 되었고 생김새와 구조, 동작 방식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대전차포라는 개념이 생성되기도 전에 개발된 판저파우스트는 일격에 전차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발전된 무기였습니다.


무한궤도와 상대적으로 장갑의 두께가 얇은 전차 후면을 보병이 공격하기에 적당한 크기와 무게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동시 휴대하기에도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방호력이 약한 연합군의 전차들이 판저파우스트에 공격에 대책없이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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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