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6. 11. 7. 07:00




2차대전까지 미국은 폭격기 만능주의에 빠져있었고 전투기인 추격기의 생산에 회의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군당국은 오롯이 "폭격기...!!"를 외쳤고 미 공군의 전신 미 육군항공대의 전술교관 클레어 첸노트와 고든 새빌과 같은 전투기파는 관심 밖에 있었습니다.


"갑자기 날아든 폭격기를 요격할 전투기"라는 명분을 앞세운 첸노트와 새빌은 항공공학자 벤자민 켈시(Bemjamin.S.kelsey)와 함께 전투기의 필요성을 피력했고 벨사의 협력으로 전투기 생산에 허가를 받게 됩니다.





제식명 P-39 에어라코브라로 명명된 전투기는 P-38 라이트닝과 함께 시제기를 선보였고 높은 성능에 감명받은 영국 공군은 대량 발주에 나서게 됩니다.


1200마력짜리 엘리슨 V-1710 엔진은 최고속도 605km/h까지 낼 수 있었으며 M4 37mm 기관포 1문, 12.7mm 기관총 4정, 7.62mm 기관총 4정, 폭탄 225kg을 장착하였습니다. 당시 전투기는 기관총 2문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화력에서 우위에 선 기종이 탄생한 것입니다.





전투기 앞공간을 엔진이 아닌 M4 37mm 기관포로 채우는 독특한 설계 덕분에 화력에서 우위를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총기의 명장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M4 기관포는 위력이 뛰어나고 내구성과 신뢰성이 높았습니다.





엘리슨 엔진은 조종석 뒤에 배치가 되었고 피탄될 가능성을 대비해서 조종사의 안전을 위한 장치까지 마련했습니다. 자동차 도어와 같은 방식의 문을 채택하고...





무게 중심을 맞추어 앞 쪽에 위치한 랜딩기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설계였으며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요소들이었습니다. 항공기 분야에 노하우가 없었던 벨사는 밀려드는 주문량으로 밤낮없이 비행기 제작에 힘을 길울이고 있었습니다.


터보차저와 수퍼차저가 합해진 과급기의 채택이 전투기로 활약할 수 있는 키포인트였으며 높은 추력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미 육군항공대의 사령관 헨리 아놀드 대장은 애초 설계보다 16km가 적은 속도에 불만을 제기했고 NASA의 전신 NACA에 개선안을 의뢰하게 됩니다.





풍동실험에서 과급기를 문제 삼은 NACA는 과급기를 제거하는 안을 내놓았고 수퍼차저만 달린 전투기로 설계가 변경이 됩니다. 폭격기 위에서 공격해야 하는 전투기의 임무특성상 높은 고도의 비행이 터보차저의 부재로 불가능해지면서 천덕꾸러기로 급추락을 하게 됩니다.


생존성을 높인다고 방탄을 여기저기 둘러 애초의 무게인 1.8톤에서 3.7톤까지 증량이 되었으니 도그파이트는 물론 폭격기의 속도를 따라가기에도 버거웠습니다. 높은 고도로 상승하면 푸득거기 일쑤였으니 전투는 커녕 추락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16km 모자란 속도를 보충하려다가 못쓰는 전투기를 만들었으니 9,584대의 생산분은 폐기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남아도는 P-38 에어라코브라를 선심쓰며 넘겨주게 됩니다. 쓸모없던 p-38은 소련군에게 넘어가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을 하게 되면서 최강의 전투기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동부전선은 낮은 고도에서 도그파이트가 벌어졌고 m4 37mm 기관포는 독일군의 전투기에 스치기만 해도 피격이 되었습니다. 기관총 2정만 빼고 나머지를 없애서 무게를 혁신적으로 줄였고 선회반경과 기동성이 증가하면서 소련군 조종사들을 에이스로 만들었습니다.


존 브라우닝의 37mm에 재미를 본 소련군은 미그기의 개발에도 주무장을 37mm로 했을 정도였습니다. P-38 에어라코브라는 미국 생산기임에도 불구하고 나토명 프레드가 붙어있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합니다.


P-38을 보면 기계에도 궁합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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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