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6. 7. 7. 06:04




세계 1차대전은 2차대전에 비해 아시아 미치는 영향도 작았고 주무대가 유럽이었기 때문에 그들만의 리그로 치부되기는 하지만 참혹하기로 따지면 2차대전은 비할바가 못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1914년이 시작한 1차대전은 천 만명에 가까운 숫자가 유럽에서 증발하는 격전이었습니다.





전차를 바탕으로 거함거포주의가 팽배했던 2차대전과는 달리 참호전으로 인해 방어와 공격이 이루어졌고 지루한 양상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초기 1년 간은 기사도가 발휘되기도 했지만 막판에는 기사도를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피폐한 상황이었습니다.





길어진 참호전으로 용변을 참호에서 해결해야 했으며 동료가 희생되어도 땅에 묻지 못하여 그대로 방치해야 했고 그 옆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해결해야 했으므로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상황이 지속되었고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면 전쟁을 치뤄야 했으므로 지옥을 방불케했습니다.





700km에 달하는 서부전선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흘려 싸우고 있었고 서부전선 주변은 식량과 병원들로 가득했으며 모든 물자는 전선으로 이동되어야 했습니다. 대공황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물자를 가지고 있던 유럽이 4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으며 많은 문화유산이 유실되었습니다.


비가오면 참호에는 물이 가득했고 젖은 발을 말릴 수 없어 발이 썩어들어가는 참호족으로 희생되는 인원이 날로 늘어갔습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전쟁이었고 소모전이었으며 독일은 염소가스로 화생전을 펴기도 하는 등 1차대전은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1차대전에 참여한 히틀러가 화학전을 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물자는 넘쳐났고 과잉된 공급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식민지개척에 나서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있었고 통일의 몸살로 뒤늦게 식민지개척에 나선 독일은 알짜를 모두 영국과 프랑스에 빼앗긴 것에 상당히 자존심이 상해 있었습니다. 유럽 역사를 통해 앙숙관계였던 프랑스에게 빼앗긴 식민지를 탈환할 방법은 국지적인 전쟁이었고 프랑스와 독일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과 동맹관계를 맺어온 철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빌헬름2세와 갈등을 겪으며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고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왕위를 이어받게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세자는 이례적으로 백작가문의 영애인 조피 폰 초테크와 결혼하였던 개혁파에 진보주의자였습니다.





풀네임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카를 루트비히 요제프 마리아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이며 황비는 조피 마리아 요제핀 알비나 초테크 폰 코크코바 운트 보그닌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공의 시녀였기 때문에 황태자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응원이 없었다면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왕이며 불운아인 요제프 프란츠 황제는 엄격하게 귀천상혼을 주장하는 보수주의자였고 당시의 분위기가 백작은 백작가문과 공작은 공작가문과 황족은 황족가문과 결혼을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참고로 신성로마제국의 국모이며 프랑스의 황비 마리 앙투와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와는 동명이인... (합수브르크 왕가의 위엄...!!)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인이 실권을 잡고 있었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슬라브계의 인사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이들의 주권을 보장하려는 정책을 구상했고 이는 보수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상당히 거슬리는 정책이었습니다.


(진보된 정책이었으나 세르비아가 자신들의 민족주의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이탈할 것을 우려한 이기심의 발로...)





오스만제국에서 독립한 범슬라브주의의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는 민족주의의 길을 걸으려고 했고 발칸반도를 노리는 러시아는 꽤나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에 합병되었고 동맹국인 독일이 러시아에게 외교적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두고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르비아의 반발은 커졌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에 대한 암살을 계획하게 됩니다. 세르비아계 민족주의 단체인 '검은손'은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아의 사라예보 육군훈련 방문에 암살을 실행하게 됩니다. 결혼 14주년이었던 황태자는 아내인 조피까지 대동하고 방문을 합니다.


사라예보에 도착한 지 1시간이 지나지 않아 검은손 단원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행진하는 황태자의 차에 수류탄을 투척하지만 주변에 떨어져 경호원과 수행원들만 부상을 입게 됩니다. 황태자는 사라예보 시청에서 강하게 항의를 했고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전에 부상자들을 방문하려고 합니다.



<사라예보 시청을 나서고 있는 황태자부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내 조피와 함께 부상자들을 방문하기로 하지만 운전병인 카운터 해리치 중위에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아 길을 잘못 들었고 Y자 합류를 지나쳐 뒤로 나가려고 했지만 이미 들어온 차들로 인해 주춤거리고 있었습니다.


암살에 실패한 검은손 단원 중 한 명인 가브릴로 프란치프는 모리츠 쉴러 카레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황태자부부를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득달같이 달려간 가브릴로 프란치프에 의해 두 발의 총성이 울리고 황태자부부는 그자리에 쓰러지게 됩니다. 방탄조끼르 입은 황태자였지만 프란치프가 쏜 총탄은 목의 경동맥을 끊었고 사라예보 시장을 향해 쏜 총알은 황태자비의 복부에 맞았습니다. 프란치프는 그자리에서 체포되었고 재판에 붙여지게 됩니다.





당시 프란치프가 사용했던 권총은 총기계의 지존 존 브라우닝이 설계하고 벨기에 총기회사 FN(Fabrique Nationale de Herstal)이 제작한 M1910...


현대 권총에 비하면 정교한 면은 없으나 워낙에 근거리에서 발사했기 때문에 치명적이었고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황태자부부는 사망을 했습니다. 이정도 상황이면 세르비아의 영웅이 되어야 하지만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됩니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라 헝가리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후 침공을 하게 되고 35개국이 참여한 1차대전이 발발합니다.


미성년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사형언도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세르비아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했고 유럽을 포화속으로 향하게 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감옥에서도 철없는 젊은 치기로 치부되어 왕따에 가까운 옥중생황을 하였고 24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합니다. (의도적으로 치료를 하지 않았다는 후문...)


당시의 유럽의 상황으로는 1차대전은 파할 수 없었다라는 분석도 있지만 두 발의 총성의 결과로 4천 만의 인명이 사상된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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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