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미 국방성은 해군과 공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투기를 생산하는 사업을 구상하게 되지만 해군과 공군의 입장 차이가 좁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공군은 90피트의 길이를 주장했고 해군은 항공모함의 운용을 고려해 56피트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미 국방장관인 로버트 맥나라나는 둘의 합을 2로 나누어 73피트로 결정을 하고 제너럴 다이나믹스를 선정하여 F111 아드바크가 탄생하게 됩니다. 공군과 해군의 입장을 고려해 제작한 길이지만 전투기로 쓰기에는 너무 크고 폭격기로 쓰기에는 작은 애매한 크기를 갖게 됩니다.
시제기를 항공모함에서 운용하던 해군은 F111을 포기하게 되고 가변익을 사용한 F14를 따로 개발하게 됩니다. 공군에서는 전투기가 아닌 공격기로 운용을 하게 되고 가변익을 이용한 저공 침투전술을 사용하게 되면서 전장에서 많은 활약을 하게 됩니다.
많은 무기를 장착하고 적진 깊숙히 침투해 폭격하고 저공비행을 통해 퇴각하는 전술로 주요 시설물을 폭격하는 공격기의 임무를 갖게 됩니다. 초기에 전투기로 개발되어 높은 기동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무 높이로 날아다녀 '죽음의 휘파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B52의 폭격 전에 먼저 투입되어 지대공 시설을 파괴하는 동시에 B52가 대단위 폭격을 하는 전술은 꽤나 적중했고 베트남전에서 위용을 발휘하게 됩니다. 최초의 초음속 터보팬 엔진인 TF30은 성능이 좋고 연비도 높아 F111에 적합한 엔진이었습니다.
가장 뛰어난 전과는 1972년 하노이 북폭작전과 1986년 리비아 공습작전인 '엘도라도'였습니다. F111의 전술로 전과를 올리기는 했지만 가뜩이나 큰 기체를 제작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첨단장비를 구축하고 업그레이드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실용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새로운 기술을 장착한 F111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비용이 커졌고 트러블도 심해지면서 대규모로 확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공화기의 발달로 전투수행능력이 최고하고 평가되던 이스라엘 전투기가 저공전술에서 격추되는 일들이 발생하면서 실전에서 한발짝 물러나게 됩니다.
후속 기종인 F15E가 실전배치되었음에도 F111은 걸프전에 참전했고 A10 선더볼트와 함께 공격임무를 수행했습니다. CAS(근접항공지원)임무를 완벽해 수행하면서 기갑전력과 지상전력의 일부를 타격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저공비행에 뛰어나 추격하던 미라지가 저공기동을 잘못해 추락하면서 킬마크를 붙이기도 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공비행전술이 퇴색하면서 스텔스로 공군의 전략이 변경되고 F111은 역상의 뒤안갈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전자기를 장착한 EF111 레이븐이 운용되기도 했지만 F15E에게 바톤을 넘겨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