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이 발발하자마자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 원수 더글라스 맥아더는 4일만에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면서 후방상륙을 통해 보급을 차단하고 북진한다는 기본적인 전술을 수립했습니다.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고 방어전을 치르고 있던 국군과 UN군은 사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후방상륙지점을 인천으로 구상하던 더글라스 맥아더의 의견에 미 해군과 합동참모본부는 말도 안되는 작전이라며 일축을 했습니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상륙할 수 있는 수로가 좁다는 이유로 성공 확률이 불과 1/5,000밖에 되지 않는 작전이라고 반박했지만 맥아더는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1950년 9월 15일을 상륙날로 정하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에 가장 위대한 상륙인 Operation Chromite, 인천상륙작전을 합동참보본부가 승인을 하게 됩니다. 맥아더는 확률인 낮은 지역이기 때문에 적의 허를 찌를 수 있다고 주장했고 합참은 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의 마오쩌뚱은 인천의 상륙을 예상하고 김일성에게 수차례 경고를 했지만 인천상륙을 믿지도 않았고 마오쩌뚱의 충고를 듣지도 않았습니다. (뭣도 모르는 김일성...!!)
김일성이 상륙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상륙작전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리는 기만전술을 사용하기도 했고 상륙에 필요한 비밀작전을 구상하기도 했습니다.
772부대의 장사상륙작전
1950년 9월 14일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에 낙동강 위에 위치한 장사군에 상륙기만작전을 실행하게 됩니다. 상륙작전에 동원된 부대는 772부대로 불리우는 중고등학생으로 구성된 772명의 학도병부대...
군사훈련을 받은 지 불과 10일 밖에 되지 않는 부대로 전투경험이 전무한 청소년들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3일간의 작전을 위해 지급된 식량과 탄약은 3일분...
상륙을 위해 출발한 문산호는 태풍 케지아를 만나 상륙 전에 좌초하게 되고 학도병들은 각자 수영으로 해안에 상륙하여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문산호가 좌초되면서 개인화기와 식량은 망실되고 전력을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772부대는 8일 동안이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조선인민군 정예부대에 맞서 270명을 사상하고 4명의 포로를 확보했으며 방어진지인 토치카 11개, 교량 2개, 도로 2개를 파괴하는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학도병 전사 139명, 부상 92명, 포로 40명의 희생을 치르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시선을 돌리는 데 성공을 했습니다.
해군첩보부대 X RAY 작전
미군은 인천지역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기 때문에 첩보부대의 운용을 고려해서 한국군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함명수 첩보대장의 휘하에 있던 17명의 첩보부대는 덕적도를 목적으로 출항을 하게 됩니다.
함영수 대장은 덕적도보다는 영흥도가 거점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고 이들을 수송하는 백구호는 영흥도로 뱃머리를 바꾸게 됩니다. 서울과 인접한 지역을 거점으로 인민군의 해안포와 병력의 분포, 기뢰탐지가 주요임무였습니다.
미 해군 정보장교 클라크 유진은 해군첩보부대와 합류하여 맥아더에게 직접 보고를 했고 상륙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전술을 확립하게 됩니다. 수원, 인천, 서울을 돌아다니며 첩보활동을 펼쳤고 의용대원들의 지원을 받으며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는 데 성공을 합니다.
9월 14일 철수 명령과 함께 퇴각하던 첩보부대를 뒤늦게 알게된 인민군이 기습하게 됩니다. 임병래 중위의 대원 6명과 의용대원 30명은 치열한 교전을 벌였고 퇴로가 막힌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대원은 비밀유지를 위해 자결을 하게 됩니다.
14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고 이들이 첩보한 정보로 수립된 전술에 의해 인천상륙작전이 감행이 됩니다.
켈로부대의 팔미도 점령작전
8240부대 산하 켈로부대는 고트 (Goat) 최규봉 공작과장, 선(Sun) 정운 군수. 보급과장, 위스키(Whiskey) 박태현 총무.인사과장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소규모의 게릴라작전을 수행하는 덩키부대까지 규합해 KLO(Korea Liaison Office), 켈로부대로 명명했습니다.
한국전 당시 많은 전과를 가지고 있으나 소규모 게릴라전이었고 덩키부대와는 별개로 운용되었으나 통합해서 켈로부대로 명명하고 있으며 가장 두드러진 전과는 인천상륙작전 직전 팔미도에 있는 등대를 점령하는 작전이었습니다.
훗날 HID를 창설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계인주 대령과 최규봉 공작과장, 연정, 클라크 대위는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는 팔미도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상륙하는 배들의 길잡이가 필요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에서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바쁜 유진 클라크 대위...)
팔미도를 점령하고 있던 인민군과 5시간의 교전 끝에 등대를 점령하고 9월 15일 0시 12분에 등대의 불을 밝히게 되어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됩니다. (사진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최규봉 공작과장...)
(켈로부대는 전후에 해체과정을 겪었다가 육해공 첩부부대의 전신이 되었고 8240부대의 장교와 하사관을 모집해 특수부대인 제 1전투단을 구성하고 제 1공수특전단을 거쳐 특전사 1공수여단이 되었습니다.)
Operation Chromite는 대성공을 이루었고 퇴로와 보급이 끊어졌다는 소문은 인민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낙동강까지 밀리는 데 81일 소요되었지만 서울을 수복하는 데는 불과 15일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던 데는 인천상륙작전의 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천상륙작전 뒤에 이름 없는 한국군들의 희생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