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2차대전 중 유럽과 아시아에서 전쟁을 마친 미국은 피로도가 상당했고 국지전에 참여하기를 꺼리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론'을 외치고 있었음에도 주한미군은 감축을 단행했고 무기지원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고 북진통일에 대해 회의적임을 시사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도 남침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했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찾아가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48번이나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미국의 군사력이 두려운 것도 있었고 동북아정세가 자신들에게 유리하지만은 않다는 판단을 했지만 김일성은 동북아정세에는 지식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철없는 김일성...)
중국의 마오쩌뚱은 스탈린에 비해 적극적으로 지원을 약속했고 남쪽에 있던 2인자 박헌영은 정치적인 욕심으로 미군의 개입이 최소화될 것임을 주장하며 김일성을 부추겼고 소련의 작전참모인 라주바예프조차도 속도전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판단을 전달합니다.
'서유럽의 구원자'로 불리우던 미 국방장관 딘 . G. 애치슨 (Dean Gooderham Acheson)은 예일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인재로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있었습니다.
미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은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전미신문기자협회와 가진 <아시아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극동방위선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됩니다.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에 이르기까지를 방어선으로 언급하면서 애치슨라인이 발표됩니다.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소련은 김일성의 끊질긴 요구에 응하게 되고 세부적인 남침 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미군과 연합군의 개입을 예상했지만 히틀러가 구사했던 전격전에 가까운 속도전이라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고 군사력에서도 우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김일성은 자신의 판단을 믿었습니다. (오판이었다...!!)
1949년 3월 대령으로 진급한 김종오는 1950년 6월 10일 춘천과 홍천을 방어하고 있던 6사단장으로 부임을 하게 됩니다. 이미 국지전을 통해 실전경험이 있는 전투병이 많은 6사단이었고 훌륭하게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화천과 인제는 북한의 영토였고 춘천은 38선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긴장감이 높았습니다.
빨치산 토벌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시기였으며 북한의 소규모 도발에 직접적인 기동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종오 대령은 병사들에게 정신교육과 훈련을 강화했으며 외박/외출을 최소화하며 병력을 집중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북한 전차병이 귀순하면서 화천일대에 40대의 탱크와 함께 병력이 집결한 정보를 입수하고 확인하여 이상징후를 예감하게 됩니다.
1950년 6월 24일 3년간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병사들은 휴가와 외박을 떠나고 전방의 지휘관들은 서울에 모여 피티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미 병력을 전방배치한 북한은 다음날 새벽 어둠을 틈타 남침을 감행하게 되고 준비가 없었던 국군은 혼비백산하게 됩니다.
1사단을 지휘하던 백선엽 대령도 이상징후를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적극적인 준비를 갖추지는 않았습니다. 속도전으로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김일성은 1군단은 서부전선으로 2군단은 동부전선에 배치했습니다.
소련이 2차대전에서 독일군에게 써먹었던 T34 탱크 242대와 전투기 170대로 속도에 집중했고 1군단이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에 성공을 했습니다. 동부전선의 2군단이 춘천을 통과해 수원으로 둘어와 한국의 1, 2, 3, 7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면 전쟁은 끝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국군 전차 0대, 전투기 0대...)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소장은 한강저지선을 확보해 진격을 막으려고 했지만 북한군은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한강 이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춘천을 지나 수원에 도착하기로 한 2군단의 소식이 들리지 않았고 북한군의 지휘부는 주춤거리게 되었습니다.
2군단과 마주한 김종오 대령의 6사단은 이미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뛰어난 전투력으로 북한군의 주력을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북한 2군단장이었던 김광협 소장은 6사단의 전력을 쉽게 보았으나 판단 착오였습니다. 7연대의 계속되는 압박으로 북한군은 진격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큰말고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19연대의 육탄 11용사가 앞서오던 탱크를 대전차포로 공격하고 해치를 열어 수류탄을 투척하여 파괴한 뒤 맨 뒤의 탱크장을 사살하고 수류탄을 투척해 봉쇄하여 SU76 자주포와 T34 탱크 10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3일 동안 진군하지 못한 2군단으로 인해 서울을 서울을 점령한 1군단도 발이 묶이게 되어 애초에 계획이 틀어지게 됩니다.
속도전에 실패한 북한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밀려 낙동강으로 후퇴하게 되지만 6사단의 저지로 한국군은 흩어진 전력을 재평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고 오키나와의 미군이 파병되고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서울이 점령되면서 6사단도 퇴각을 했지만 낙동강에서 다시 압록강까지 진격할 때 선봉에 선 것은 6사단이었고 압록강에서 수통에 물을 담은 것도 6사단 7연대였습니다. 이후 9사단장에 임명된 김종오 대령은 백마고지전투에도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전역을 하게 됩니다.
춘천에서 북한 2군단은 7,00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기록했고 사상자가 길에 너무 많아 탱크가 진격을 할 수 없어 강으로 밀어내거나 궤도로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타격을 받았습니다. 북한군 2사단장 김광협 소장은 책임을 물어 김무정 중장으로 바뀌었고 2사단장 이청송은 최현 소장으로 12사단장 전우는 최춘국 소장으로 바뀌게 됩니다.
6사단은 이후에도 제 2땅굴을 발견하고 대간첩작전에서 공을 세우면서 메이커부대로 명명되고 있으며 한국전에서 가장 잘 싸운 부대로 선정되었습니다. 김종오 대령의 철저한 준비와 6사단 장병들의 공로가 없었다면 적화된 인민공화국에서 배를 곯며 주체사상을 배우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