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4. 2. 16. 16:59



세계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전쟁을 끝내기 위해 연합군은 육해공 연합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연합군 총사령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지상군 사령관인 버나드 몽고메리원수가 주축이되어 캐나다와 프랑스가 연합을 하게 되는데요..



상륙작전을 위해 모였던 지휘관들은 유보트 사령관인 칼 되니츠를 떠올리며 고심을 하게 됩니다. 2차대전은 영국과 되니츠와의 싸움이라는 이야기가 생길정도로 그의 유보트 위용은 대단했습니다..



최소한 북대서양에서만큼은 말입니다. 영국에 비해 나약할정도의 해군력에서 이만큼 유보트가 유명세를 떨친건 모두 되니츠덕입니다..







칼 되니츠는 1차대전에서 유보트 함장으로 참전을 했지만 영국군의 포로가 됩니다. 전후 급하게 해군을 정비하던 히틀러는 잠수함대 사령관에 그를 임명하게 되는데요. 유보트 건조에 깊이 관여하며 300척의 유보트만 있으면 전쟁을 이길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육군에 비해 턱없이 푸대접을 받은 독일해군의 현실과 잠수함 건조 기술의 한계로 늑대떼작전을 창안합니다..



실제로 북대서양에서 악명을 떨쳤던 유보트의 상시 가용대수가 10척미만이었다는것을 봤을때 되니츠의 주장대로 100척이 가용되었다면 영국은 박살이 났을겁니다..



에레히 레더 제독이 히틀러와 해군운용에 관해 갈등을 빚으며 사임을 하게 되자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됩니다. 해군의 운용이 맘에 들지 않았던 히틀러는 그의 입김을 빌어 대서양함대를 해산시키려했지만 그 존재만으로 연합군에 위협이 된다는 되니츠의 설득으로 철회를 합니다..



실제로 비스마르크급의 함선이 출항한다는 소문만으로 연합군 함대가 긴장했을정도로 위협적이었습니다. 전후 윈스턴 처칠이 가장 무서워했던 존재로 유보트를 꼽았다고 합니다..







유보트는 북대서양을 넘어 태평양까지 진출을 하게 되는데요. 미국의 중심인 뉴욕의 앞바다에 침투를 하면서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되니츠가 버티고 있는 도버해엽을 건너 상륙작전을 펼친다는것은 기름바르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격인데요. 이를 의식해서인지 연합군은 노르망디가 아닌 칼레에 상륙을 하다는 루머를 퍼뜨립니다..



이 소식을 첩보한 히틀러는 칼레에 모든 병력을 집중시키는데요.여기에는 북아프리카에서 명성을 떨쳤던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장군이 해안방어 책임자로 있었습니다..



칼 되니츠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에르빈 롬멜이라니..



그래도 롬멜은 노르망디에서 멀찌감치 떨쳐놨으니 일단은 안심입니다.하늘도 연합군을 도왔는지 전날까지 급변했던 날씨가 잠잠해지면서 시계는 낮았지만 침투하기 좋은 상태로 되었습니다.몽고메리원수의 주장대로 강행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많은 연합군의 피해를 주면서 성공하게 됩니다..



2차대전의 분수령이 되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성공은 곧 독일의 패망을 불러옵니다.칼레에 집중했던 칼 되니츠와 에르빈 롬멜은 전열을 가담지만 이미 전세가 기울어가고 있었는데요..







칼 되니츠는 히틀러의 자살후 정치적인 유언으로 독일의 4대 대통령이 됩니다. 총통의 자리를 대통령과 총리로 나누어 총리는 요제프 괴멜스가 맡기를 원했지만 괴멜스는 자살을 합니다..



나치의 2인자였던 하인리히 히믈러도 총통의 유언을 따르고 신분을 바꿔 도주중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자살합니다. 히틀러의 바램대로 최후 항전을 포기한 되니츠는 동부전선의 민간인과 병력을 영미연합군에게 항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소련군에게 항복할시 잔인한 보복이 감행된다는것을 염려한 그의 마지막 작전이었습니다.연합군과 맺어진 항복조약에서 대표로 나온것은 칼 되니츠였고 나치전범 재판에 회부됩니다..







국가원수이며 나치의 해군사령관이었던 그의 죄목중 유보트부대를 너무 잘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는것이 추가되었는데요. 재판관의 질의에 미해군 태평양함대 체스터 니미츠제독은 되니츠를 전폭적으로 옹호하는 답신을 제출했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저보고 그 일을 다시 하라면 할 것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길정도로 대가 있는 군인이었습니다. 죽는날까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절대 뉘우치지 않았는데 이유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져버린 군인은 적군에게도 비웃음거리로 전락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치에도 참여하고 전범재판도 받은 그지만 인종청소인 유태인 학살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비인도적인 명령은 거부했습니다. 10년의 형량을 받은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군사전문가들 사이에서 그가 명장이라는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패전국의 사령관이었지만 열학한 지원속에서도 연합군을 떨게했던 유보트의 무용담만이 남았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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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