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5. 10. 22. 17:56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조카인 단종의 자리를 빼앗고 자신이 왕이 된 수양대군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 잘못된 왕위이다. 과도한 권욕력이 갖는 나쁜 예를 후세에 알려주며 많은 고통을 안고 말년을 보내게 된다. 그의 제위기간은 1455년에서 1468년으로 불과 13년동안 권력을 갖기 위해 그 많은 피를 흘렸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어려서 아버지 세종에게 좋은 아들이었다. 무예에만 능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시와 글을 좋아했고 많은 지식을 섭렵했다. 세종조차도 그의 능력을 높이 여겨 정종의 수렴청정 시기에 정종을 도와 많은 일을 도모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어질고 성품이 온순한 정종에게 수양대군의 호방함이 아쉬울 수 있었을 것이다.


정종을 왕세자로 책봉했지만 수양에게도 많은 업무를 맡긴 것은 그의 능력도 비범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세종은 아버지 때부터 자신까지 장자가 왕위를 이어나가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고 정종의 병세와 수양대군의 능력을 알고 있었지만 정종이 왕위에 오르게 하는 것에 많은 집중을 했다.


당시 왕권은 권고하게 다져진 시기가 아니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흔들리는 왕권을 태종이 잡아 놓았고 세종이 안정시켰으나 언제나 신권이 커지면 흔들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어질고 온순한 왕이지만 왕권을 지켜나갈 수 있는 단호함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종말기에 정종에게 혹독한 수렴청정을 실시한다.


수양대군에게는 왕인 형을 도와 왕조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몇차례나 했고 그런 아버지의 부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눌렀다. 사신을 자처하며 외부로 돌아다녔고 사냥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사자가 풀을 먹고 있는 형국이었다. 운명은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


왕을 보필해 달라는 선왕의 바램과는 달리 김종서, 황보인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은 황표정치를 통해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 갔다. 강화된 신권의 중심에 김종서가 있었고 이 때문에 수양의 측근들은 김종서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실천에 옮기게 된다. 안평대군이 왕위에 욕심이 있었다는 것도 수양이 더 빨리 움직이게 된 계기이다.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세조는 왕권강화에 힘을 쏟는다. 호패법을 실시하고 6조직계제를 실시해 모든 힘의 중심을 중앙으로 모이게 했다. 권력층에 모여있는 권력을 개편했으며 오가작통법을 실시해 세수의 원활함을 만들었다. 면과 리로 구분하여 지역을 나누는 면리제는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세조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는 왕위를 찬탄한 폭군이라는 멍에를 안고 있다. 모든 정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한가지로만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수양은 아버지인 세종보다는 할아버지인 태종의 성향을 많이 닮았다고 평가하는 것이 중론이다. 태종이 호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것이 다가 아니다.


세종이 태평성대를 이루며 성군이 되는 것에는 태종의 혹독한 훈육과 더불어 조선의 왕권을 세우기 위해 공신인 민씨 처남들과 세종의 장인마저 처형하는 악역을 자처했다. 수양의 왕권 찬탈에 대한 것은 더 이상 이야기할 것 없는 사실이지만 자칫 신권으로 향할 수 있는 조선의 힘을 왕으로 집결시킨 것은 오롯이 그의 노력이었다.


태종과 수양대군의 모습은 근현대사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잣대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옹호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런 리더가 없었다면 혼란한 시기에 지금과 같은 번영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데 힘을 모으고 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지만 맞는 이야기이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양위받은 초기에 이루어진 폭정과 근현대사의 역사는 비슷한 이유로 탄생을 했다. 수양대군이 있었기에 어지러운 나라가 왕권법치주의로 확립할 수 있었고 500여년의 조선역사가 있을 수 있었다. 수양대군을 왕위를 찬탈한 폭군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역사의 한 면만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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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