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O2022. 2. 17. 12:01

 

 

남자라면 차를 좋아할 수 있다. 젊은 남자가 멋진 차에서 내리는 장면은 감탄할 정도로 매력적이고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 멋진 차와 아름다운 여자는 이전부터 공식처럼 남자가 이루어야 할 상징으로 각인되었고 아드레날린을 뿜어낸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남자라면 멋진 상상을 할 수 있고 이루었을 때의 엄청난 자극에 매료되게 마련이다. '카푸어'라는 오명을 가지고서라도 감수하고 싶은 욕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카푸어' 삶에 대해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60억 인구가 모두 같은 방향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다른 길을 걷은 것을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무례한 태도이다. 사람을 평가하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신이 가진 완벽한 고유의 영역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카푸어가 어떤 삶을 이어나가든 나와는 무관하기에 전혀 신경쓰고 싶지 않다. 그러나 카푸어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회피하기 위해 펼치는 대단히 구차한 변명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사회가 자신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허무맹랑이다.

 

 

 

 

사회의 왜곡으로 20대가 강남에 있는 20억짜리 집을 살 수 있는 희망이 사라졌기에 그들이 선택한 대안이라는 변명은 너무도 궁색하다.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20대가 집을 소유하는 경우는 드문 경우이고 이런 경우는 책에 실릴 정도로 엄청난 결과이다.

 

이전 세대가 취업과 동시에 집을 구매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주장은 완전한 허위이다. 이전 세대도 30년 이상을 노력해도 집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집에 집착하는 풍토가 조성된 것도 이런 기조에서 발전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전 세대는 너무도 쉽게 집을 마련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는 주장은 거의 SF에 가깝다. 1980년에서 1990년 사이에도 대한민국 중심에 위치한 집을 소유할 수 있는 20대는 전무했다고 말할 수 있다. 환타지에 가까운 상상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그 시대 젊은 세대도 미래가 불안해서 지금을 즐기고 싶은 부류는 있었다. 자신의 선택을 사회의 왜곡된 시스템으로 돌리고 토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카푸어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스스로 위축되었다고 거짓 이유를 끌어대는 것은 멋진 남자의 모습이 아니다.

 

 

 

 

궁색함을 넘어 치졸하게 비춰지기까지 한다. 멋져 보이는 삶을 위해 카푸어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것에 위축될 필요는 없다. 멋진 남자로 비치는 상상을 현실로 실현한 것과 미래를 위해 지금을 덜어놓은 선택이 공존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치졸한 모습은 상상하던 멋진 모습과 엄청나게 다르다. 카푸어로서 삶이 상상하던 것과 다른 방향일 수 있으나 선택에 대한 이유를 자신이 아닌 사회나 남탓으로 돌리는 찌질한 모습은 보이지 말자.

 

 

반응형
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