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미국에게 문호를 개방하면서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외세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아시아의 중심에 서기를 희망했습니다. 유럽에서 두 번째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을 바탕으로 주변국을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를 발판으로 중국 대륙까지 진출하려던 오랜 바램이 서서히 현실이 되어갔고 일본 군부와 천왕 '히로히토' 는 동아사아 패권국이 될 것을 자신했습니다. 만주사변부터 난징대학살을 주도한 히로히토는 군부와 함께 진주만을 기습하기로 결정합니다.
군부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히로히토의 재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미국이 참전하면서 일본은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이성을 잃는 일본 군부가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면서 두 발의 하얀 버섯 구름이 피어오르고 일본은 항복을 선언합니다.
태평양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일본으로 날아온 연합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는 잿더미로 변한 일본을 재건하는데 고심하게 됩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동북아시아 정세에 무지했고 맥아더가 전범을 처리하고 일본을 재건하기를 바랬습니다.
히로히토가 거주하는 고쿄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설치한 맥아더는 전범을 처리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태평양전쟁의 중심에 선 40명의 전범을 체포하는데 성공했고 도조 히데키, 도이하라 겐지, 이타가키 세이지로, 히로타 고키와 같은 A급 전범을 심문했습니다.
일본 정세에 밝은 보너 팰리스가 담당했으며 미 의회는 전범과 히로히토를 국제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사형 선고를 내리기를 원했습니다. 의회뿐 아니라 소련과 일부 국가에서도 전범과 히로히토 천왕을 군사재판에 세우고 일본을 정리해야 하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바램과 달리 맥아더 장군은 히로히토가 법정에 서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전했고 히로히토를 중심으로 일본을 재건하는 '블랙리스트 작전' 을 계획했습니다. 히로히토가 태평양전쟁에 중심인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정무적인 판단이었다고 항변했습니다.
의회와 트루먼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면서 전범재판에서 히로히토를 제외해야 한다고 맞서기까지했습니다. 맥아더의 주장대로 A급 전범들은 국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거나 죄를 물어 형이 선고되어 형무소에서 남은 생을 보냈습니다.
맥아더는 왜 히로히토를 그토록 보호하려고 했을까?
일본을 직접 방문해 전후 처리를 맡았던 맥아더는 일본 국민이 자신의 생각보다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했고 일본이 동북아시아의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평가했습니다. 히로히토를 재판에 세우는 것이 원칙지만, 수많은 일본 국민이 자결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실제로 맥아더가 처음 부임해서 히로히토와 사진을 촬영할 때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면서 일본 내 여론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히로히토가 굴욕을 당했다고 토로하며 자살 소동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절대적인 존재였던 히로히토를 벌하는 것은 오히려 혼란을 가중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맥아더는 내각을 온건파로 채우면서 새로운 헌법을 재정하고 히로히토를 달래 일본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왕이라는 명예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히로히토는 상징적인 왕으로 전쟁에 대한 면책을 받았고 1989년이 되어서야 죽음을 맞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