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세기 유대왕국은 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2세에 의해 멸망하였고 유대인은 2천 년 동안 유럽 각지를 떠돌았다. 유일신인 야훼가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나타나지 않았고 1차대전에 영국 외상 '아서 벨푸어' 선언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희망을 본다.
맥마흔 선언과 중첩되면서 이스라엘은 무리하게 독립을 선언하였고 팔레스타인과 오랜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유럽 각지에 흩어졌던 이스라엘은 오랜 핍박 속에 획득한 자본이 축적되어 있었지만, 전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군사력이 전무했다.
하가나 민병대와 독립을 갈망하는 군조직이 있었지만 2차대전 이후 버려진 장비와 총기로 전쟁을 수행하기는 어려웠다. 조심스럽게 이스라엘은 지원한 것은 체코였고 뒷배경에는 소련이 있었다. 소련은 중동 내 공산 세력을 키우기를 희망했고 초기에는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이스라엘이 미국과 협력하면서 소련은 아랍을 지원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체코도 더 이상 무기를 지원할 수 없었다. IDF(Israeli Defence Force, 이스라엘 방위군) 은 자체 개발한 무기를 요구했고 IMI(Israel Military Industries, 이스라엘 군사산업)이 앞장선다.
설계자인 우지엘 갈(Uziel Gal)에 의해 빛을 보게 된 "우지 기관단총" 은 9mm 권총탄을 사용하며 간단한 구조에 내구성을 갖추었다. 총열이 짧고 탄창을 권총 손잡이에 삽입하는 방식이어서 휴대가 용이했고 오픈볼트 방식 중에서는 명중률이 높았다.
2차 중동전쟁부터 IDF에 의해 전장에 등장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세계 각국은 이스라엘이 개발한 새로운 기관단총에 관심을 가졌다.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유럽 내 특수부대와 가격이 상당히 저렴한 이유로 3국에서 구매 요구가 빗발쳤다.
2차대전에서 유태인에 빚을 진 서독은 이스라엘이 개발한 기관단총을 제식 채택하였고 우지 기관단총은 날개 돋힌듯 팔려나갔다. 미국에서는 '잉그램 기관단총' 과 같은 우지 기관단총의 아류가 등장하였고 유럽 내 총기회사들도 기관단총으로 향했다.
뮌헨올림픽 테러사태로 전세계에 테러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졌고 전장이 시가지로 옮겨지면서 화력으로 민간인이 사상되는 것을 우려했다. 상대적으로 관총력이 작은 기관단총이 인기를 끌게 되었고 90여개국 이상이 사용하는 총기가 되었다.
미국 대통령 경호기관인 '시크릿서비스(Secret Service)' 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 현장에서 우지 기관단총을 꺼내드는 것이 포착되면서 유명세에 기름을 부었다. 우지 기관단총이 유명세를 타면서 테러단체에서 사용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
파괴적이고 걸출한 기관단총인 H&K MP5가 등장하면서 유명세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다양한 바리에이션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마이크로 우지와 권총형인 우지 피스톨을 선보였지만, 이미 흐름은 넘어갔고 우지의 위치는 이전과 달라졌다.
흐름이 달라졌음에도 50여개국에서는 여전히 우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가벼운 중량과 내구성, 휴대편의성은 여전히 최고로 평가된다. 우수한 총기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지 기관단총은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었지만, 치명적인 총기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