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회의적인 여론을 형성한 미국은 2차대전이 불거진 유럽에 발을 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중립을 선언하면서 연합군과 독일에게 무기와 자원을 공급하는 것이 실익이었고 미국 내 여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은 미국이 참전하기를 바랬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아돌프 히틀러' 와 유능한 육군 장성이 벌이는 독일 전격전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덩케르크에서 영국군이 겨우 살아오기는 했지만, 굴욕을 겪었고 자존심은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유럽과 다르게 태평양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일본 중심으로 완벽하게 돌아갔으며 미국의 심기를 건드지 말자는 일본 군부 일부의 의견이 수렴되었습니다. 청일전쟁이 길어지면서 이성을 잃은 일본 군부는 미국의 콧털을 건드리기로 결정하고 선전포고를 선포합니다.
참전을 결정하지 않은 미국의 미온적인 태도를 관찰한 일본은 이미 내어준 필리핀을 통과해 인도차이나로 가기를 희망했습니다. 뛰어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진주만' 을 기습 공격하였고 미국을 2차대전에 끌어들였습니다.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한 일본의 계획은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면서 예상된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했고 아시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진주만 기습을 완벽하게 마무리하지 못하면서 도취 빠졌습니다.
일본에 이어 독일도 미국에세 선전포고를 했으며 미국은 태평양과 유럽에 파병을 결정하면서 2차대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미국의 참전을 눈꼽아 기다렸던 윈스턴 처칠에게는 희망적인 소식이었고 일본과 독일에게는 비보였습니다.
일본 군부는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과의 전면전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고 필리핀 주변 국가를 침공하기까지 했습니다. 인도차이나와 인도를 차지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였고 미국은 태평양 일대에 거점을 확보하기 시작합니다.
태국에 도달한 일본은 1932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정권을 이양한 '쁠랙 피분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총리와 동맹을 맺게 됩니다.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빠졌던 피분송크람은 일본을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이소시프 스탈린이나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되기로 결정한 송크람은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일본과 협력에 집중했습니다. 일본 군부는 동맹국으로 동남아시아 패권을 태국에게 부여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이를 수용하면서 미국과 대척점에 서게 됩니다.
1942년 1월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일본, 독일에 이어 2차대전 소용돌이 속으로 스스로 빠져들게 됩니다. 태평양에서 일본이 우세했던 전세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미국으로 기울게 되었고 일본 본토까지 폭격 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됩니다.
피분송크람의 반대 세력이 미국 내에서 활동하면서 패전국에 이름이 오르지는 않았지만, 미 육군항공대 소속 B-29 폭격기가 수도 방콕을 집중 폭격하기도 했습니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피분송크람이 축출되었고 전범으로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태국은 2차대전에서 중심이 된 일본과 독일에 이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세 번째 국가가 되었고 전후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의 지원하에 별다른 제재 없이 역사의 에피스드를 장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