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영국 육군이 창설한 코만도는 현대 특수부대의 개념을 정립한 최초의 소규모 게릴라부대였습니다. 코만도부대는 여타의 병사들과 달리 노르웨이를 비롯한 독일군 요충지에서 용맹스럽게 활약을 했고 '아돌프 히틀러' 는 포로로 잡힌 코만도 대원을 즉결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지휘관들과는 다르게 일반 병사들은 용맹스러운 코만도 대원에게 감동을 받았고 일부에서는 존경의 표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포로로 잡힌 코만도 대원을 다른 신분으로 둔갑시켜 수용소로 이송하기도 했고 전사한 대원은 제대로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습니다.
코만도부대는 세계 최강으로 불리는 영국 특수부대 SAS(Special Air Service)에게 이전되었고 유럽 내 많은 특수부대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유럽 내 특수부대 중에서 코만도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도 코만도의 위상이 어떠한가를 반증하는 대목입니다.
최초의 현대 특수부대라는 위대한 수식어가 따라붙고는 있지만, 코만도 창설 배경 뒤에는 다소 쓰라린 경험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2차대전은 독일군이 펼치는 전격전에 속수무책으로 점령되었고 영국군은 도버해협을 건너게 됩니다.
영국의 참전을 원하지 않았던 히틀러는 난감했으나 오랜 숙적인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결정합니다. 육군 참모총장을 바라보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에 의해 입안된 "낫질 작전" 이 히틀러 눈에 들어왔고 벨기에 아르덴 숲을 돌파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전차를 앞세운 독일군이 아르덴 숲으로 올 줄 짐작도 하지 못한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하인츠 구데리안' 이 이끄는 선봉대에게 밀려 '덩케르크' 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40만 병사가 덩케르크 해변에서 고립되었고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은 구출 작전을 명령합니다.
"다이나모 작전" 으로 명명된 영국군 후퇴 작전에서 '윈스턴 처칠' 은 해안에 군집한 병사 10%만 구출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덩케르크 해안은 수심이 낮아 대규모 수송 선박이 접근하기 어려웠고 독일 육군은 턱밑까지 진격해 있었습니다.
조종술 뛰어난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는 급강하 폭격기 수투카로 덩케르크에서 후퇴를 기다리는 영국군 병사를 괴롭혔고 병사를 태우고 도버해협을 건너는 수송선을 기다리는 U보트 함대는 먹이감을 기다리는 늑대처럼 어뢰 공격으로 수송선을 침몰시켰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영국군 33만 명은 기적이라고 위로하는 영국 국민의 위로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덩케르크 해안에는 영국군이 버리고 간 야포 880문, 대구경포 310문, 대공포 500문, 대전차포 850문, 기관총 11,000정, 전차와 장갑차 475대, 일반 차량 63,000대가 그대로 방치됐습니다.
치욕적인 굴욕을 당한 영국군은 싸울 수 있는 무기가 전무했고 미국이 지원해 주는 무기가 대서양을 건너기 전까지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영국을 쓰러뜨릴 기회라는 장성들의 의견을 무시했고 영국이 재참전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재정비에 들어간 영국은 미국에서 공수된 장비와 무기로 다시 전장으로 향했고 소규모로 주요 시설을 타격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을 수용했습니다. 육군 코만도가 탄생하였고 덩케르크에서 굴욕을 당한 많은 영국 젊은 병사가 자원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당한 굴욕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영국 병사는 코만도가 벌이는 대부분 작전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급격하게 전세가 기울었던 영국은 코만도 활약으로 다시 사기충천했고 서부전선에서 역전을 거두면서 독일을 패망의 길로 인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