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째로 접어들고 있는 시리아 내전으로 시리아 인구 2,300만 명의 절반 가까이인 1,200여만 명이 전쟁 난민이 되었고 300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습니다. 2011년 '아랍의 봄' 으로 불어닥친 민주화 열풍에 참가한 시리아의 앞길이 대규모 유혈 사태로 변모한 것입니다.
시리아는 13%의 시아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69%의 수니파가 대부분 국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아들인 바샤르 알 아사드에게 세습하면서 40년에 가까운 독재가 이어졌고 국민이 궐기에 나선 것입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정부군은 무력을 동원했고 동맹국인 러시아와 이란이 참여하면서 수니파 종주국으로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대립 관계를 형성했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우호 관계인 미국이 개입하게 됩니다.
시리아 내 자리 잡은 IS 격퇴를 위해 쿠르드족이 참전하고 터키 내 갈등을 빚고 있는 쿠르드노동자당과의 연계를 의심하며 참전 중인쿠르드 인민수비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은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의 대립에서 시아파와 수니파,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미국과 러시아, 터키와 쿠르드족의 대리전 양상을 번지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전이라고는 하지만 유럽까지 영향이 확대되면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기도 합니다.
시리아 내전을 단순히 시리아만의 것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역사의 배경에 서구 열강의 행보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 수많은 식민지를 개척할 당시 거대한 영토를 가진 중동 터줏대감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현재 터키로 이어진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을 겪으면서 쇠퇴했고 러시아의 묵인 아래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 피코 협정(sykes Picot Agreement)" 을 맺습니다. 영국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와 조르주 피코가 맺은 조약으로 중동지역은 양분됩니다.
요르단, 이라크 남부, 지중해 지역을 차지한 영국과 터키 남부 이라크 북부, 레바논 지역은 프랑스가 차지했습니다. 영국은 아랍 독립을 약속하며 '맥마흔 조약' 을 체결했고 이스라엘에게는 '벨푸어 선언' 을 동시에 맺으면서 중동을 화약고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만평
이스라엘은 벨푸어 선언을 근거로 2차대전이 끝나자마자 독립을 선언했고 팔레스타인과 지금까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차지한 지역에 속한 시리아는 중동 국가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기형적인 형태를 갖게 됩니다.
대부분 중동 국가는 시아파나 수니파 한 갈래로 구성되지만 시리아는 영국과 프랑스 조약으로 권력을 차지한 소수 시아파와 다수 국민 수니파로 구성되면서 불안정한 형국이 아슬아슬하게 지속되었습니다.
시리아 내전은 시리아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내부적인 갈들이 표출된 것이며 강대국들이 이권을 위해 참전하면서 확전된 것입니다. 영국은 중동 난민이 자국 내로 유입되는 것에 반감을 표시하며 유럽 연합에서 탈퇴를 선언했고 독자적인 노선을 택했습니다.
자국 내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에 대해 격하게 공감하지만 100년 전에 저질렀던 과오가 화살이 되어 돌아오는 것에 대한 반성은 없습니다. 시리아 내전을 비롯한 중동 내 대부분 갈등이 영국과 서구 열강에 의해 일어난 과오라는 것에 이견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