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절 미국은 공산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것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며 주변국 쿠바에서 발생한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쿠바 내 미국인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물론, 경제 제재까지 단행하면서 압박을 가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미국이 벌이는 압박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군사작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CIA가 중심이 되어 입안된 '자파타 작전(Operation Zapata)'으로 쿠바에서 탈출한 반공산주의자 부대를 창설합니다.
1,500명에 달하는 지원자로 구성된 부대는 "2506여단" 으로 불리웠고 과테말라에 캠프를 마련하고 훈련에 매진하게 됩니다. 아이젠하워가 작전을 실행하기도 전에 정권은 존 F. 케네디로 바뀌었고 자파타 작전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CIA와 군 수뇌부는 케네디가 집권한 지 3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쿠바 침공을 주장하였고 자파타 작전 성공에 대한 기대감을 피력했습니다. 젊은 대통령과 참모들은 경험이 부족하다는 일부 인식을 잠재우기 위해 다소 무리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전을 감행하기로 합니다.
다소 미적거리는 기미를 눈치챈 군 수뇌부는 명분이 약하다는 것으로 고민하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진주만 기습과 같은 자작극을 펼치자는 "노스우즈 작전" 을 제안했고 케네디와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는 자파타 작전을 실행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명분 없이 쿠바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전면에 나설 수 없었고 내부 혁명으로 보여야 했습니다. 자파타 작전을 위해 많은 자금이 소요되었고 CIA와 군 수뇌부가 워낙 자신감을 표현했기에 케네디와 맥나마라는 외교적 부담을 짊어지기로 했습니다.
소규모 게릴라 작전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변모한 자파타 작전은 후에 "피그만 침공" 으로 불리우게 되었고 미국이 벌이는 군사작전을 감지한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10배 넘는 병력을 준비했습니다. 침공과 함께 반기를 들기로 한 쿠바 내 반정부 인사들도 미연에 구금되었습니다.
1년 동안 훈련을 마친 2506여단은 극렬하게 전투에 임했지만, 병력의 한계를 넘지 못하면서 1,200명가량이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지상 지원을 하기로 했던 공군 공격기는 내전으로 보이기 위해 적극적이면 안되는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소극적인 공세를 취한 것도 실패한 원인입니다.
자파타 작전으로 명명된 피그만 침공이 실패로 기록되면서 카스트로가 장악한 정권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대대적인 광고를 해댔고 케네디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굴욕의 중심인 CIA를 해체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군 수뇌부와 갈등이 시작된 기점이기도 합니다.
2506여단 1,200여 명을 석방시키기 위해 5,300만 달러에 달하는 물품을 지급하였고 쿠바는 보복을 두려워해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CIA와 군 수뇌부는 이후에도 무리한 군사작전 몽구스를 입안하였고 케네디와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집니다.
CIA와 군 수뇌부가 기획한 야심 찬 계획이었지만, 이후에 벌어지는 쿠바와의 군사적인 대립 관계의 시발점이 되었고 소련이 개입하면서 3차대전으로 확전될 뻔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