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12. 14. 07:00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라는 타이틀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영국이지만 세계 처음으로 수식어를 획득한 나라는 스페인이었습니다. '카를 5세' 가 서거하면서 스페인 국왕으로 왕위를 이은 '펠리페 2세' 는 아버지와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통치권을 행사했습니다.





카를 5세는 카톨릭을 고집하지 않았고 다양한 문화에 대해 이해하는 폭이 넓었지만 펠리페 2세는 카톨릭만을 고집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면서 금과 은을 획득하였고 재정상태는 유럽 내에서 최고 위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반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네덜란드와 갈등을 빚고 있었고 주변국이었던 섬나라 영국이 간섭에 나서면서 펠리페 2세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영국은 작은 변방 섬나라로 재정상태가 상당히 취약했고 노략질을 서슴치 않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가 벌이는 해적질을 눈감아 주기도 했습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노략한 것들이 국고로 편입되면서 영국 황실 재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공로를 치하하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기사 작위를 하사하게 됩니다. 해적에서 기사가 된 드레이크는 스페인에게 정면 도전을 하였고 남아메리카로 원정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와 영국을 모두 침공하기로 맘먹은 펠리페 2세는 산타 크루즈 제독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130척에 달하는 대군을 구성했습니다. 스페인 해군은 '무적함대' 로 명망이 높았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모두 섭렵하며 재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이 해양대국으로 성장하면서 강국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무적함대' 입니다. 펠리페 2세는 유럽 내 최고 육군 지휘관인 파르마 공작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와 칼레에서 합병하여 영국 본토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무적함대 '아르마다' 는 칼레로 떠났고 영국에서는 드레이크가 맞서 출발을 했습니다.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산타 크루즈는 칼레로 떠나기 전 갑자기 사망하였고 사령관 자리에는 성실하지만 해전 경험이 적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해전은 화포로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함선끼리 근접하여 백병전을 펼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함선에는 승조원보다 백병전에 능한 육군이 가득했습니다. 영국군은 상대적으로 함선도 적었고 백병전보다는 원거리 함포사격으로 스페인과 맞서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마침내 스페인 '무적함대' 와 드레이크가 이끄는 영국 해군이 칼레에서 맞붙었고 영국은 화포로 집중 공격을 했습니다. 원거리에서 중포로 공격하는 영국 해군 근처로 가기 위해 스페인 함선들은 방향을 잡았지만 드레이크는 잡히지 않으려고 거리를 두었습니다.





칼레 해전 당시 화포는 커다란 쇠구슬을 포에서 폭발시켜 날리는 방식이었기에 많은 포격에도 무적함대 피해는 적었습니다. 드레이크는 갑자기 불어닥친 바뀐 바람을 이용하기로 하였고 여러 척의 함선에 불을 지펴 화공선으로 공격하였습니다.


화공을 예측했던 정박했던 무적함대는 닻을 끊고 분산했으며 북해를 넘어 스페인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도보해엽을 벗어난 무적함대는 북해를 돌아 아일랜드에 도달했지만 두 번의 태풍으로 닻 없는 함선들은 힘없이 난파되어 흩어졌습니다.





전투로 인한 손실은 불과 3척이었고 난파된 함선은 81척이었지만 무적함대는 칼레에서 명성을 잃게 됩니다. "칼레 해전"으로 명명된 스페인과 영국 해군 간의 전투는 재해권을 영국에게 넘겨주면서 영국이 '대영제국' 으로 성장하여 세계 영토 1/4을 차지하는 계기가 됩니다.





스페인은 몰락하였고 네덜란드는 독립하면서 막강한 강국으로 성장하였고 '동인도회사' 가 설립되어 동북아시아에 진출하기도 합니다. '하멜 표류기' 를 쓴 하멜은 독립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직원이었고 제주도에 표류한 뒤 네덜란드로 돌아가 기록을 남겼습니다.


칼레 해전은 '세계 3대 해전' 이나 '4대 해전' 으로 불리우며 중세와 근대사를 거쳐 영국이 제해권을 통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인 대영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 중대한 역사적 해전으로 평가되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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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