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7. 7. 07:00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소련을 공산화한 이오시프 스탈린을 주시합니다. 공산주의가 확산되지 않도록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면서 얄타에서 회담을 열어 전후 상황을 마무리하려고 했습니다.


두 번의 커다란 전쟁으로 유럽은 물론 북미와 남미, 아시아까지 경제 기반이 무너졌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소련과의 대립까지 가져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은 독일과 동부전선에서 전쟁으로 치르면서 군비를 강화하기는 했지만 미국과의 전면전은 부담스러웠습니다.





서로간의 이익이 상충된 가운데 2차대전은 독일의 패전으로 마무리되었고 아시아 패전국 일본이 점유했던 한반도는 소련과 미국이 분할하여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차지하면서 대립각을 갖게 되었고 서로가 날선 공방으로 정치적 헤게모니를 다투었습니다.


대한민국이 탄생하면서 남쪽에는 대통령이 선출되었고 북쪽에는 젊은 지도자로 김일성이 발탁되었습니다. 공산주의 리더인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한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소련의 하부조직을 관리할 수 있는 인물을 물색하였고 두 명이 물망에 올랐습니다.





소련 유학으로 성장한 엘리트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소련군 대위 출신의 김일성을 두고 스탈린은 저울질을 했고 최종적으로 김일성을 북쪽의 관리자로 지명하게 됩니다. 스탈린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똑똑하고 공산주의 이론을 꿰뚫고 있는 박헌영은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수인에 가까운 역할을 하기에 박헌영은 지나치게 판세를 잘 읽고 있었고 국제정세에도 나름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창하는 바가 명확했습니다. 국제 정세 따위는 관심도 없으며 권위에 대한 욕심만 가득하며 충직한 김일성이 더 나은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나이가 어리기도 했지만 남침에 대한 야욕이 커서 스탈린에게 48번에 달하는 남침 허가를 요청하였고 모스크바에 두 번이니 찾아가는 정성을 보였지만 스탈린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2차대전으로 피로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순간에도 김일성은 어린 아이 보채듯이 스탈린을 향해 끊임없이 지원을 요청하였고 거듭되는 요구에 전차와 전투기를 지원하였고 군사고문을 파견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말 잘듣는 어리숙한 인물을 택한 것이 스탈린의 의도이기는 했지만 뭣도 모르게 덤벼대는 김일성의 어의없는 행보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습니다. 국방장관 딘 에치슨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동북아 정세에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남침은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딘 에치슨 국방장관>



2차대전 동부전선에서 보였듯이 스탈린은 군사적인 지휘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으며 판세를 읽는 것보다는 체제를 이어나가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스타일입니다. 소련 내부에서 스탈린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으며 동부전선에서 헛발질을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독재를 한 히틀러와 스탈린은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을 뿐 막상막하의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히틀러가 더 병크였던 것이다...)


에치슨 라인을 발표하면서 동북아에 대한 불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면 한반도의 정세를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탈린이 전면에 내세운 것만으로도 김일성의 무능을 입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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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