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4. 15. 07:00


일찌감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꿈꾸던 일본은 오랜 염원이었던 동아시아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첫 발을 시작으로 태평양에서 전쟁을 통해 많은 국가를 굴복시키려고 했으며 자원을 강탈하고 인력을 착취하는 행위를 서슴치 않고 자행했습니다.


군국주의를 앞세운 일본은 자국민들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세웠고 전세가 불리해지기 시작한 미드웨이 해전이 이후로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자살특공대를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전세가 완벽하게 기울면서 항복을 권유받았지만 군부의 고집으로 두 발의 원자폭탄을 투하받게 됩니다.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핵폭탄 투하에 대한 맨하탄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수립하고 있었고 주요 군사시설을 파악하고 투하할 순서까지 정해 놓은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의 능력을 우숩게 생각한 일본 군부의 오판이 치욕적인 굴욕과 엄청난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일본의 국민들도 군국주의가 최고의 정신이라는 데 동의를 했고 태평양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것에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 군부가 주입시킨 무서운 관념이 어의 없는 결과를 낳게 되는 단적인 예가 있습니다.





1944년 겨울 필리핀 마밀라 근처의 루방 섬에 파견된 오노나 히로 소위는 루손 섬을 공격하는 주력군을 엄호하기 위해 비행장 활주로를 파괴하고 유격전을 벌이라는 명령을 하달받습니다. 사단장 여코야마 시즈오는 오노다 소위에게 끝까지 항쟁할 것을 명령합니다.


항복은 물론 옥쇄도 허락하지 않은다는 사단장의 명령을 받은 오노다 소위와 250명의 초년병은 정글로 들어가 전투에 참전했고 207명이 전사하게 됩니다. 미군이 상륙하면서 주력군은 루방 섬 인근에서 퇴각하였고 일본은 마침내 패전하여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게 됩니다.





정글에서 숨어지내며 게릴라전을 펼치던 43명 중에 20명은 미군이 뿌린 전단으로 종전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투항하여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나머지 병사들과 오노다 소위는 미군의 책략이라고 믿으면서 사단장의 명령을 상기하며 항전하게 됩니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전선을 사수하라는 명령만을 믿으며 정글에 숨어지내던 일행은 오노다 소위, 시마다 오장, 고즈카 일병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일찌감치 투항했던 동료들은 루방섬을 찾아 전쟁이 끝났음을 알렸지만 오노다 소위와 두 명의 일본군은 미군의 책략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세 명의 패잔병은 섬에 상주하는 원주민을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필리핀 정부는 토벌대를 섬으로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노다 소위의 가족까지 섬을 찾아 종전되었음을 알렸고 투항하기를 호소했으나 이를 믿지 않았고 1954년에 시마다 오장이 토벌대에 사살됩니다.


종전 20년이 되던 해에 고즈카 일병이 사망했으나 오노다 소위는 혼자서 정글에 남아 유격전을 수행했으며 여전히 종전을 믿지 않았습니다. 탐험가 스즈끼 노리오는 오노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루방 섬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여 오노다를 만나게 됩니다.




침착한 어투로 전쟁이 종전되었음을 알렸고 오노다 소위는 그제서야 현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노다 소위는 전쟁 시기와 같은 두발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소총 한 정과 탄환 500발, 수류탄 6발을 소지하고 있었고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오노다 소위는 직속 상관의 항복 명령을 직접 전달받기를 원했고 종전 후 서점을 운영하던 다니구치 요시미를 수소문하여 루방 섬으로 불러들이게 됩니다. 다니구치 요시미는 항복 명령서를 전달했고 29년 간의 치뤘던 기나긴 항전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일본으로 돌아온 오노다 히로는 우익들에게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영웅이 되었으나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브라질로 이민을 가게 되었으며 1942년에 참전하여 1974년에 퇴역한 유일한 일본군으로 기록되는 진기록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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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