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4. 3. 26. 10:45




히틀러가 세계정복의 야욕을 가지고 일으킨 2차대전은 많은 나라에 피해를 안겨주었고 특히 유럽과 동유럽에 엄청난 사상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이때 쌓은 노하우로 소련은 냉전시대 미국을 대적할만한 무기들을 생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데요.

 

독일이 2차대전에서 승기를 올리기도 했고 고전했던 동부전선에는 육군의 명장들이 많았습니다

이곳의 명장들은 독일과 히틀러에게 많은 승리를 안겨 주었지만 나치의 측근인 참모들의 모함으로 해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나치당과는 다르게 자신의 조국을 위한 마음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진짜 군인들로 패전국의 지휘관이지만 아직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수상이었던 처칠과 동부전선의 상대였던 주코프가 인정한 명장을 만나보겠습니다

 

 

 

발터 모델

 

 

히틀러의 소방수라 불리우며 동부전선에서 방어전에 뛰어난 성과를 올린 독일의 원수입니다

풀네임은 오토 모리츠 발터 모델로 1차대전에서는 보병장교로 참전했습니다

 

2차대전이 시작되는 폴란드침공에 선봉에 섰으며 독소전쟁에서 소련에게 밀려 연합군에 포위되자 부하들을 해산시키고

"독일의 원수는 항복하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기고 자살합니다

 

전쟁 초기 제9군단 참모장을 시작으로 제16군 참모장, 제3 기갑 사단장, 제41 군단장, 제3군 사령관을 거쳤으며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남부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남부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전전선의 인원을 한눈에 보는 신기한 시야를 가지고 전선이 안정되면 다른 전선으로 부대를 재편성해 투입하고 투입함 전선이 안정되면 다시 부대를 재편성해 전투가 치열한 지역으로 재투입하는 지휘로 동부전선의 방어에 뛰어난 전과를 가지게 됩니다

 

유태인 수용소에 577,000명 강제노역으로 175,000 이송한것을 물어 전범으로 몰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살을 선택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전선에서 고전을 하고 있을때마다 전선의 안정을 가져오면서 히틀러의 소방수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독일 기동전의 선구자라고 불리우는 장군으로 원래는 독일 중앙의 참모로 활약했으며 포스트 육참총장으로 거두되었습니다 루드비히 베크 육군참모총장의 참모장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브롬베이크- 프뤼치사건에 연류되어 나치가 육군에 중책을 차지하면서 좌천되었습니다

 

국방장관이었던 베르너 폰 브롬베이크와 육군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뤼치를 밀어내기 위해 괴링과 나치당이 모함을 하게되고 루드비히의 수족이었던 만슈타인도 변방인 동부전선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동부전선으로 좌천되기전 제안했던 낫질작전을 히틀러가 직접 브리핑 받게되면서 신뢰가 구축되어 중요한 작전에는 사령관으로 임명이 됩니다 프랑스 침공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고 독소전재에서 바로바로사작전, 세바스토폴전투, 제6군구츨작전에 참여하여 전과를 남기게 되는데요

 

쿠르스크전투에서 히틀러와 이견을 보이며 대립하였고 남부집단군 후퇴의 책임을 물어 사령관에서 해임하게 되고 후임으로 발터 모델이 임명되면서 만슈타인은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히틀러 자살후 대통령이 된 칼 되니츠가 중용하려고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종전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18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4년뒤 석방되었고 1973년 생을 달리했습니다

 

 

 

 

하인츠 구데리안

 

 

전격전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며 후에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을정도로 히틀러에게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전쟁초기부터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친분이 있었으며 만슈타인의 낫질작전을 세울수 있는 전선의 정보를 제공해줍니다

 

전쟁초 폴란드침공에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했으며 독소전쟁에서도 뛰어난 전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갑부대를 기본으로한 전격전을 창시해 실전에 응용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타이거전차의 생산에도 참여하여 전선에 필요한 실질적인 부분을 개선하면서 최고의 전차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바로바로사작전에서 보급을 담당했던 귄터 폰 클루게와 대립하면서 모스크바 공략 실패의 책임을 물어 사령관에서 해임이 됩니다

 

그러난 작전의 실패보다는 히틀러에게 직언을 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는 설이 더 많습니다

1943년 3월 다시 재임명 되면서 상급대장으로 진급하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부상을 당한 쿨트 자인츠러 상급대장 후임으로 육참총장이 됩니다

 

친분이 있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포스트 육참총장이었는데 구데리안이 대신 앉게되네요

독일 패망전 다시 히틀러와 전술을 두고 대립하면서 해임을 당하게 되고 연합군에 체포되지만 무죄로 석방됩니다

 

 

 

아직도 독일군의 명장들의 작전들이 회자되면서 미 육군사관학교와 영구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술 교본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동부전선을 이끌었던 명장들의 치명적인 단점은 독일군이었다는 농담이 나올정도로 능력이 대단했었는데요

 

동부전선의 사령관들은 칼 되니츠와 에르빈 롬멜과 더불어 적장들도 인정한 명장들로 아직도 명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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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