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3. 29. 07:00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대전을 발발시킨 독일은 당시 최고의 육군 전력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를 다음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프랑스를 침공하는 것이 2차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장성들에게 어필했으며 충성심 높은 군인들은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프랑스는 1차대전에서 얻은 교훈으로 알자스부터 로렌에 이르기까지 참호와 요새를 만들기 시작했고 프랑스 국방장관의 이름을 기려 마지노선이라고 명명했습니다. 1927년부터 10년이라는 시간과 20조에 달하는 건설비용으로 막강한 요새가 탄생한 것입니다.


독일은 마지노선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확실한 기갑전력이 뒷바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2차대전 초기의 독일 기갑전력은 소형 전차 위주로 마지노선을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판터나 타이거전차는 2차대전 말기가 되어서야 개발이 되었기 때문에 개전 초의 프랑스 침공에서는 엄두를 낼 수도 없었습니다.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으면서 대두된 것이 대규모의 포격이었습니다. 요새를 일격에 공격할 수 있는 대규모 포를 제작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최선이라고 판단한 독일 수뇌부와 히틀러의 거포주의는 이동이 편리하도록 열차포를 제작하는 것까지 발전했습니다.





중량 1,350톤에 달하는 800mm구경, 40.6구경장을 가진 거포는 무거운 구스타프라는 의미의 "슈베어 구스타프"로 불리웠습니다. 완벽에 가까운 마지노선의 철옹성의 요새를 공격하기에는 구스타프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어야 제대로 해 볼만 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었습니다.





이동이 쉽게 열차에 포를 얹는 방식을 택하면서 이동이 자유로워지기는 했지만 일반 선로가 아닌 전용 선로가 필요했고 포를 회전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800mm 철갑탄은 포탄 내부에 25kg의 작약으로 채워져 있었고 포를 발사할 때 버섯구름이 피어나기도 했습니다.





구스타프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3주 전부터 진지를 구축해야 했기 때문에 마지노선을 공략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내부적으로 암암리에 나돌게 되었습니다. 고막이 터질 정도로 위력을 가진 엄청난 거포였지만 실용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요소들이 즐비했습니다.





히틀러와 장성들이 고민하고 있던 틈에 전선에서 활약하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는 낫질작전을 입안하면서 주의를 끌게 되었습니다. 마지노선을 통과하지 않는 대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우선 침공하여 우회하는 작전을 자세히 들은 히틀러는 낫질작전에서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만슈타인은 육군 참모총장을 꿈꿀 정도로 유능한 지휘관이었고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과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도 낫질작전을 지지했습니다. 프랑스를 우회하는 낫질작전에 대한 불안감은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식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마지노선을 공격하기 위해 제작된 구스타프 열차포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고 낫질작전으로 벨기에 아르덴 고원을 통한 프랑스 침공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히틀러가 우려하던 반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우려보다 손쉽게 프랑스를 점령한 것입니다.





엄청난 화력을 자랑할 틈도 없이 사장의 위험에 빠진 구스타프 열차포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세바스토폴 요새를 공격하게 될 때가 되어서야 다시 언급이 되었습니다. 마지노선을 능가하는 수준의 세바스토폴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구스타프 열차포는 출동을 했고 48발을 쏘고 강선이 모두 망가졌습니다.


독일로 보내져 수리를 마치고 다시 투입되기를 기다렸으나 작전은 취소되었고 엄청난 위력을 다시 발휘할 기회가 없어졌습니다. 전쟁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5년 4월 경 연합군에 의해 발견이 되었지만 노획을 방지하기 위해 포는 이미 파괴되고 잔해만 남겨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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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