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테리2017. 1. 31. 07:00


미국 역사상 가장 젊고 유능한 대통령으로 불리웠던 존 F. 케네디 (John Fitzgerald "Jack" Kennedy)는 냉전시대의 정점에서 미국의 수장으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보수적인 세력들과의 갈등을 겪었고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로마 카톨릭 신자였으며 아일랜드계 혈통을 가졌습니다.





잉글랜드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미 의회에서 케네디는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케네디 옆에는 세계적인 석학들이 그를 따랐고 엘리트 그룹은 미국의 성장동력으로 떠올랐습니다.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미국을 건설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존 F. 케네디의 인재들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개혁을 주도하던 케네디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보수주의자들은 그의 행보가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고 전세계를 경악에 몰아넣은 삭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는 재선을 위해 텍사스주 댈러스를 방문하게 되었고 다운타운을 거쳐 연설지로 향하던 카퍼레이드에서 저격을 당하게 됩니다. 포드 링컨 컨티넨탈을 방탄 차량이었으나 지붕을 오픈한 상태였고 3발의 총성은 케네디를 절명하게 했습니다.


젊고 유능한 대통령 케네디는 46세의 나이로 화려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는 사건 조사 하루만에 마피아 하부 조직원 잭 루비(Jack Ruby)에 의해 살해가 됩니다.


전국 방송으로 오스왈드의 죽음이 생중계되었고 케네디 암살 사건은 많은 의혹을 낳으며 미국인들에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로 남게 됩니다.





당시 퍼레이드 앞에서 8mm 필름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고 있던 에이브라함 자프루터(Abraham Zapruder)는 역사적인 장면을 촬영하게 되었고 케네디 암살은 눈 앞에서 목격하고 촬영한 중년의 여인을 프레임에 담게 됩니다.


미국인들은 그 중년 여인을 "바부슈카 레이디 (Babushka Lady)" 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녀가 러시아 여성들이 사용하는 머플러인 바부슈카를 머리에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과 영부인 재클린을 바로 앞에서 목격하고 촬영한 바부슈카 레이디는 암살 사건의 열쇠로 부각되면서 미국을 들끓게 했습니다. 그녀의 소재를 파악하면 당시의 정황을 정확하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케네디 암살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갈등을 겪었던 부통령 린든 B. 존슨은 대통령에 즉각 취임했고 영부인 재클린에게 겁박하는 언동을 보였습니다. 암살 사건의 수사는 미진했고 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부슈카 레이디의 존재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사건 현장을 유유히 빠져나간 바부슈카 레이디의 행방은 묘현했고 케네디 암살에 대한 의문은 날로 증폭되어 갔습니다. 사이가 좋지 않은 FBI국장 존 애드거 후버가 거론되기도 하며 CIA 배후설, KGB 암살설등이 나돌았으며 테쿰세의 저주, 평행이론이 난무하기도 했습니다.


35대 대통령 JFK의 암살 사건은 많은 의혹만을 품은 채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1970년 비벌리 올리버(Beverly Oliver)라는 여인은 스스로를 바부슈카 레이디라며 주장하고 나섰고 당시 촬영했던 카메라를 증거물로 내놓기도 했습니다. 리 하비 오스왈드와 잭 루비와의 관계를 털어놓았고 잭 루비의 수첩에서 비벌리 올리버의 전화번호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케네디 암살 사건이 재조명되고 비벌리 올리버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지만 증거물로 내세운 카메라는 1963년에 생산되지 않았고 그녀의 진술이 신빙성을 잃으면서 헤프닝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JFK의 암살 사건과 바부슈카 레이디는 음모론자들에 의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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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