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2차대전이 말기로 치닫던 시기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게 수세에 몰려있었고 본토가 공습당하며 주요 거점시설들이 파괴되어 보급에 차질을 빚으면서 패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습니다.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주변국들을 식민지로 여기던 일본은 마지막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카미카제특공대로 자살을 종용하였고 국내외의 모든 남성들에게 입대를 강요했습니다.
일본 도쿄에 위치한 게이오대학 동양사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21살의 청년 김준엽에게도 군입대는 현실이 되었고 지원을 가장한 징집에 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국 서주지역 쓰가다부대로 배속받았으나 그의 머릿속에는 오롯이 탈출과 광복군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부대에 배속되면서 나침반을 챙기고 탈출경로는 탐문하며 마땅한 때를 기다렸습니다.
기회를 잡은 김준엽은 탈출에 성공했고 친구 장준하, 윤경빈과 함께 광복군이 되기 위해 충칭으로 길을 재촉합니다.
좌로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서주부터 충칭까지는 2,500km 6,000리에 해당하는 거리였습니다. 탈영한 학도병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에게 노출되거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에게 발각되면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의 정세를 혼란스러웠고 충칭까지의 길은 험난했습니다. 무자비하다고 알려진 공수특전사의 1,000리 행군의 6배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대장정에 돌입한 것입니다.
임천, 남양, 노하구, 해발 3천미터의 파촉령을 겨울에 넘어 천신만고 끝에 충칭 임시정부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범석 장군 휘하에서 CIA의 전신 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 정보파괴반 훈련을 수료하고 광복군 국내정진군 강원도반 반장에 임명되어 대기 중 광복을 맞게 됩니다.
광복후 김구선생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게 됩니다. 북한과 중국을 연구하고 공산주의에 대해 학문적인 접근을 한 선구자로 중어중문과를 신설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는 문구를 헌법 전문에 포함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면서 중국 상해에 위치한 만국공묘에 안장된 임시정부 요인 군무부장 노백린, 대통령 박은식, 법무총장 신규식등 5구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옮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한국을 방문한 천기친 외교부장과 직접 대면해서 유해를 옮기는 것을 주장하였고 1993년 8월 국립묘지에 안장하면서 광복군의 임무를 다했다고 스스로를 치하했습니다.
군부집권 시기 고위관리직을 제의했으나 거절하였으며 "고려대학교 총장이 총리보다 높은 자리인데, 총장하다가 어찌 총리가 되나?" 며 노태우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하며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많은 제안이 있었으나 관직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군부시절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학생들의 탄압의 수위가 높아지고 이를 옹호한 총장 김준엽의 사퇴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사퇴를 결정했으나 학생들이 나서서 사퇴 철회를 외쳤습니다.
학생들이 총장의 사퇴를 외치는 현세대와 반대되는 상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광복 시기까지 뚜렸한 족적이 없다는 이유로 폄하되고는 하지만 학도병으로 살엄한 부대를 탈출하는 것만으로도 일본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기는 일이었고 발각되면 즉결 사형이기에 폄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 중론...
엘리트라고 해서 권위와 부를 쫒는 소인배가 아닌 대인배 중의 대인배로 기억되고 있으나 친구이며 동지인 장준하 선생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준엽 선생처럼 숨겨진 영웅들이 더 많이 빛을 발하고 추대되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