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6. 12. 12. 07:00




2차대전 말기를 접어들며서 기세등등하던 히틀러의 기갑부대는 동부전선에서 연이은 참패를 맞게 됩니다. 전격전의 창시자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하인츠 구데리안의 시대가 접어들었고 히틀러의 소방수 발터 모델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독일군은 방어전에 더 많은 전력을 집중했고 동맹국인 이탈리아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는 연합군은 이탈리아전선에 있는 독일군이 프랑스로 퇴각하기를 원치 않았고 병력을 투입해 공방전을 벌이기로 계획합니다.





몬테카시노 (Monte Cassino) 앞 쪽에 위치한 구스타프방어선을 구축한 독일군은 로마로 향하는 연합군의 발목을 잡고 있었고 미 육군 36연대는 빠른 진격을 원했습니다. 공격하는 연합군과 방어하는 독일군이 맞닥들인 것은 몬테카시노였습니다.






몬테카시노 정상에는 중세시대의 유적 베네딕투스 수도원이 위채했고 많은 유적과 보물들이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수도원의 수사들과 이탈리아 민간인들이 다수 기거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했으며 독일군이 정상에서 연합군을 정찰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상황으로만 볼 때 연합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했으며 주위를 둘러있는 조그만 강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버금케했습니다. 방어전에 가장 적합한 지리적 요충지를 독일군이 점거하고 있는 것은 연합군 중에서도 선봉에 선 미군에게 상당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미 육군을 지휘하고 있는 마크 웨인 클라크(Mark Wayne Clark)는 뛰어난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미 육군과 국방성에서 손꼽히는 지휘관이었고 이탈리아전선의 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믿었습니다. 마크 클라크 장군은 한국전쟁에서 UN군 최고사령관을 지낸 인물이기도 합니다.





독일군 지휘관은 공군인 루프트바페의 노련한 인물 알베르트 케셀링(Albet Kesselring) 원수였습니다. 육상전투에 공군지휘관이 배정된 것은 몬테카시노에 투입된 독일군 부대가 공수부대인 팔슈름야거(Fallschrimjager)였기 때문입니다.





팔슈름야거는 독일 공수부대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전투력을 인정받아 방어전에도 자주 투입되어 전과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몬테카시노에 팔슈름야거를 투입한 것은 독일군 지휘부에서 중요한 방어선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 지휘부의 예상은 맞았고 몬테카시노의 팔슈름야거는 연합군의 발목을 잡는데 성공을 합니다.





몬테카시노 전투와 같은 고지전은 방어병력인 독일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접전에 많은 경험과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팔슈름야거를 투입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폴란드, 남아프리카, 캐나다, 인도, 뉴질랜드, 이탈리아 파르티잔까지 합류했지만 철옹성에 근접할 수 없었습니다.


미군 지휘관인 마크 클라크는 베네틱투스 수도원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고 독일군의 방어진지로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에 회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도원을 파괴하더라도 방어선을 무너뜨려야 하는 압박감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산 뒤에서 날아오는 독일군의 포격은 너무도 정확했고 연합군은 베네딕투스 수도원을 방어진지로 사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케셀링 원수는 베네틱투스 수도원의 가치를 알고 있는 지휘관이었고 문화재의 파괴를 원치 않았기에 수도원을 방어진지로 삼지 않았으며 부하들에게 절대 접근금지의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이를 연합군에게 알리며 베네딕투스 수도원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방어전에 성공하고 있는 독일군과는 다르게 연합군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방어선을 넘어서지 못하면서 베테딕투스 수도원의 폭격을 결정하게 됩니다. 외벽의 두께가 3m가 넘어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휘관 마크 클라크는 공중폭격을 원했습니다.


B-17 플라잉 포트리스가 융단폭격으로 베네틱투스 수도원을 폭격했고 수도원은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독일군의 방어진지로 사용한다는 연합군의 예상은 빗나갔고 민간인의 피해만 늘어났습니다. 독일군 중령 율리우스 슐레겔(Julius Schlegel)에 의해 중세유물 1만2천권과 미술품은 바티칸으로 옮겨진 뒤였습니다.





베네딕투스 수도원의 폭격으로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우위에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연합군의 예측과는 달리 1,3,4연대의 팔슈름야거는 건재했고 무너진 외벽들은 방어전에 필요한 엄폐물이 되었습니다. 중세유적까지 폭격하면서 전장의 우위를 기대했지만 비난만 받게 된 상황입니다.





구스타프 방어선에 투입된 70만 명의 독일군보다 소수의 팔슈름야거의 전공이 더 컸고 연합군의 피해는 날로 늘어갔습니다. 1월에 시작한 전투는 5월이 되도록 진척이 없었으나 폴란드군의 활약은 누부셨습니다. 독일이 가장 먼저 침공한 것이 폴란드였고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였습니다.


폴란드군은 자신들과 함께 병영생활을 했던 러시아산 불곰 보이테크(Wojtek)를 탄약보급중대에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새끼 때부터 분대원들과 생활한 보이테크는 무거운 탄약보급을 차질없이 수행하면서 최초의 전쟁 참전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탄약을 한 발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2군단의 부대마크로 부상하기도 했습니다만 폴란드가 공산화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 위치한 동물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폴란드군이 선봉에 서서 적극적인 전투를 이끌었고 사면이 포위되면서 팔슈름야거는 야간의 어둠을 틈타 퇴각을 했습니다. 치열한 몬테카시노 전투는 연합군의 점령으로 막을 내렸으나 독일군의 패배라고 드러내놓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전과이기는 합니다.


몬테카시노 전투의 승리로 구스타프 방어선을 무너졌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독일군은 모든 전선에서 패망의 그림자를 안게 됩니다.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한 최초의 한국인 김영옥 대령의 회고에도 회자되고 있으며 전쟁 말 팔슈름야거의 명성을 드높인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몬테카시노 전투로 인해 생긴 팔슈름야거의 별명은 "녹색 악마..."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