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바르세유조약에 의거해 군대와 무기의 제한을 받았고 고물가에 시달리면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제국주의자이며 오스트리아인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득세하면서 독일은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폴란드침공을 시작으로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가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획기적인 무기발달의 근거가 되었으며 미국은 공황을 타개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기갑전력을 앞세운 폴란드침공은 히틀러의 계획보다 쉽게 끝을 맺었으나 프랑스와 영국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습니다.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는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독일 침공을 위해 41개 사단과 르노의 전차 2,400대를 소집했습니다.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은 여전히 예비전력을 확보하지 못했고 프랑스의 침공에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프랑스가 독일을 침공하면 전쟁이 종료될 수도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영국 또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기갑전력을 앞세운 독일이기는 했지만 초기 독일군의 전차는 타이거나 판터와 같은 중전차가 아닌 경천차 일색이었습니다.
전차의 역사는 프랑스와 영국이 더 오래되었고 기술력도 앞선 상황이었습니다. 호기롭게 폴란드를 침공했지만 독일은 1차대전에 이어 다시 한 번 패전국이 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는 전력이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1차대전에서 벌였던 참호전의 영향으로 공격을 우선하는 쪽이 불리하다는 것이 당시의 정설이었고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프랑스는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프랑스와 맞닿아 있는 지리적인 영향도 있지만 지그프리드와 마지노선이 버티고 있어 독일이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여력이 없다는 오판을 한 것입니다.
전선에 맞닿은 독일군은 대치한 프랑스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마을마다 "독일군이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우리는 공격할 의사가 없습니다"라는 간판을 세우고 삐라를 뿌렸습니다. 일부 전선에서는 교향곡을 연주하며 화해의 무드를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서로 약속한 가운데 포격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피해는 없었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전선에 모여 파티를 열기가지 했으니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화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전선의 평화와는 달리 군수뇌부를 지휘하고 있는 히틀러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마지노선을 격파할 궁리에 머리가 깨질 정도였고 육군원수 프리츠 에리히 리핀스키 폰 만슈타인이 입안한 "낫질작전"을 심도 깊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벨기에를 되돌아 프랑스 외각부터 낫질하듯이 공격하는 전술은 히틀러의 승인하에 진행되었고 평화롭던 가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우세한 군사력을 보유한 프랑스가 독일의 손에 들어가면서 긴장감은 높아졌고 영국은 연합군의 힘으로 독일을 상대하게 됩니다.
이후의 전쟁은 모두가 아다시피 포화속으로 접어들었고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는 우를 범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에 접어들게 됩니다.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했음에도 제대로된 공격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히틀러가 계획한 고도의 기만전술에 프랑스가 당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는 의견도 있습니다.
Phony War로 불리우기도 하는 가짜 전쟁은 살벌한 2차대전 초기에 벌였던 프랑스와 독일의 헤프닝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