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6. 10. 13. 07:00




6월 25일의 기습 남침으로 전국토가 북한의 발아래 놓였고 이를 만회하는 상륙작전 크로마이트는 전세를 역전시켰고 국군은 북진으로 통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진격한 연합군은 흥남을 기점으로 또 한 번의 상륙작전을 펼쳤고 치명적인 실수로 평가됩니다.


중앙을 비우고 진격한 틈을 우려하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군과 연합군은 퇴로가 차단되었고 흥남을 통한 해로 철수를 계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중공군은 매 번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하며 국군과 연합군에게 공포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37도선까지 밀려내려 온 연합군은 한반도 철수를 논의하기 시작했으며 전쟁의 피로감을 느낀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철군을 결심하게 됩니다. 미군의 희생이 더 커지기 전에 전선에 퇴각하기를 원한 트루먼은 미 육군참모총장 로튼. J. 콜린스를 한국에 급파합니다.


8군 사령관인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철군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반격의 틈을 노리고 있었기에 콜린스의 설득이 필요했습니다.


한강까지 급속도로 밀고 내려오던 중공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며 연합군은 중공군의 꿍꿍이에 공포심이 증폭됩니다. 군사전문가들은 중공군이 새로운 전술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했고 이 소문은 연합군의 떨어진 사기를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게 했습니다.





중공군 원수 펑더화이(팽덕회)는 연합군의 예상과는 달리 고심에 빠진채로 진격을 멈추고 있었습니다.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서부전선에서 3만명의 사상자와 2만 5천 명의 동상, 질병, 탈영병이 발생했고 동부전선에서는 4만 명의 사상, 동상, 각종 질병, 탈영병이 발생했습니다.


급격한 남하로 보급선은 길어지고 병사들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국군과 연합군이 알지 못하게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병력을 재편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합군의 예측과는 달리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동안의 중공군의 기세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낀 리지웨이 장군은 소규모 부대를 운용한 위력수색작전인 '울프하운드'를 계획합니다. 적의 동태를 살피는 소규모 작전은 유효했고 중공군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규모 전투의 승리로 바닥을 향하던 병사들의 사기도 회복되면서 중공군의 신출귀몰한 존재가 허상이었음을 병사들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수원을 중심으로 이천과 횡성까지 이어진 전선을 기반으로 반격작전인 '선더볼트'의 가능성을 미 육균 참모총장 콜린스에게 리지웨이가 보고하고 설득하면서 반전의 기회를 획득합니다.





작전명과는 다르게 각 전선에 배속된 부대들과의 기밀한 협력으로 점진적인 진격을 통한 작전은 군포의 수락산과 용인 김량장리의 전투에서 중공군과 맞닥뜨리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게 됩니다.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터키군이었으며 수락산에서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됩니다.


김량장리 전투에서는 착검후 백병전으로 돌진하는 의외의 전술로 중공군 474명을 사상했습니다. 이어지는 패배로 사기가 떨어지고 철군까지 논의됐던 전선의 상황이 '선더볼트작전'으로 급반전 되기 시작합니다.


펑더화이는 선더볼트작전으로 북경으로 날아가 마오쩌뚱과 전선을 논의할 정도로 중공군에게 위협적이었고 연합군에게는 대반전이었습니다.





한국전에서 획을 그은 작전들과는 달리 알려지지 않은 '선더볼트'는 중공군의 기세를 꺾고 다시 한 번 서울을 수복하는 반전의 계기로서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서울의 관문인 관악산을 잇는 보급로를 확보하고 전선의 위치를 끌어올린 공은 매슈 리지웨이 장군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력수색작전인 '울프하운드'와 뒤를 이은 '선더볼트'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중공군의 위세를 떨어뜨리고 전선의 극적인 반전으로 한국전의 양상을 바꾼 뛰어난 전술 중에 한가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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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