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4. 3. 2. 21:11



 

세계 2차대전 소련과 대치했던 동부전선에서 엄청난 전과로 방어전의 신이라 불리웠던 발터 모델이 있었습니다..

풀네임은 오토 모리츠 발터 모델 (Otto Moritz Walter Model)입니다..

 

1차대전에 보병장교로 참전을 했으며 1939년 폴란드침동 당시 제9군단 참모장이었고 이후 서반진격전16군 참모장,

제3기갑단장, 제41군단장, 제9군사령관을 역임했습니다..

 

1941년 시작된 소련과의 전투에서 모스크바 정면을 두고 소련군의 반격에 대항하며 교묘한 방어전을 벌여 전선을 안정화 시키면서 히틀러에게 신임을 얻게 됩니다..

 



 



동부전선 각지에서 전과를 올리면서 히틀러의 소방수라는 별명이 붙게되고 소련군에 엄청난 병력 손실을 주게 됩니다..

1943년 7월 쿠르스크전투에서 북쪽을 주로 공격했지만 별다른 전과를 얻지 못하다가 모스크바 서쪽 30km안으로 들어가는 공을 세웁니다..

 

1944년 1월 해임된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 후임으로 북우크라이나군집단 사령관에 취임하고 3월에 원수로 승진하게 됩니다. 1944년 6월 소련 바그라티온작전에서 붕괴된 중부집단군 사령관을 겸임하게 되면서 자신의 책임이 된 위태롭던 전선을 바로 잡습니다..

 

8월 귄터 폰 클루게의 후임으로 서방군총사령관, B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서부전선으로 옮기게 됩니다..

당시 전선이 연합군의 진격으로 괴멸상태가 되어 모델도 힘을 발휘할수 없었습니다..

 





 

9월 게르트 폰 룬트슈테르 원수가 서방군총사령관으로 재임명되고 모델은 B집단군 사령관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1945년까지 서부전선의 집단군 사령관직을 수행하면서 9월 연합군의 마켓가든작전을 막아내는 공을 세우게 됩니다..

 

발지전투에 벌어질 대규모공세는 현재의 전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히틀러에게 피력했지만 설득하지 못하면서 작전에 실패하게 되고 이때부터 히틀러에게 신임을 잃기 시작하고 독일은 패망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B집단군이 쿠트지방에서 연합군에 포위되자 지휘하의 부하들에게 해산을 명령하고 독일의 원수는 항복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지만 실제 이유는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57만명과 노역목적의 18만명의 이송작전의 책임을 물어 전범자로 처형될걸 염려했다는설이 있습니다..

 

발터 모델이 자살하자 괴벨스 총리는 독일패전의 책임을 모델에게 몰아 비난하는 방송까지 했습니다..

군사전문가들이 모델을 높이 평가하는것은 동부전선에서 부족한 기갑전력과 병력에도 불구하고 매 전투에서 전과를 세웠다는것입니다..

 



 



최초 소련군과 대치하면서 모델은 부족한 기갑전력을 메우기 위해 흩어져 있는 포병을 모아 집중적으로 운용하며 필요한 시간과 장소에 정확하게 타격하기 위해 통신선을 완벽하게 구축해서 전선의 안정화를 가져오는 전술을 펼쳤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펼쳐진 공세적방어전으로 동부전선의 점령지를 차츰 늘려갔는데요..

병력과 전력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소련군을 상대로 펼쳐진 방어전으로 소련군의 데미지는 점점 커져갔고 승기를 독일쪽으로 가져왔습니다..

 

모델이 가장 무서웠던점은 수백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선의 상황과 병력을 모두 파악하고 전술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전투가 안정화된 지역의 병력을 재편성해 상대적으로 치열한 지역으로 배치, 이곳이 안정화되면 재배치하는식으로 공세를 펼쳤는데요..

 

서부전선 B집단군 사령관으로 재임시 마켓가든작전의 승리로 전선이 안정화되자 예비부대를 편성해 동부전선으로 보낼 계획까지 세웠지만 발지전투에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라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전선단위로 예비부대를 운용하며 다양한 방면에 응용했던 방어전과 임기응변헤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세계 2차대전을 일으키 독일이지만 군사적 전술이나 운용이 대단했던것은 사실입니다..

 

발테 모델의 가장 큰 단점은 독일군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올정도로 전술에 능했고 방어선 구축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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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