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가난한 자는 왜 부자 편에 설까?

원초적한량 2022. 11. 10. 16:20

 

 

부자가 부자를 위한 정책을 수립하는 집단을 지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가진 부가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되었고 대단히 부당하다고 생각되지만, 이런 과정은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끼워진 잘못된 단추이다. 자본주의에서 부는 새로운 계급이기에 '부당'은 절대 대치이다.

 

부자가 부자편에 서서 부자가 더 많은 부를 가져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선진된 사회이고 '분배'까지 실천해 부자들이 칭송되는 문화가 자리한 나라가 미국이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개념을 정확하게 알고 실천하는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당연히 철학을 가질 수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척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부류가 기득으로 발전했다. 그러기에 부자는 당연히 부를 중심에 두고 부를 가진 이들과 연합하며 부를 최고로 칭송하게 된다.

 

부를 가지지 않은 가난한 자는 당연히 부를 가진 자와 대척점에 있다. 부를 가진 자를 부러워하고 부를 축척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으나 부를 가진 자가 벌이는 부당한 것에 동조할 필요는 없다. 부를 가진 자를 위한 정책을 가난한 자가 동의하는 것도 동일선상이다.

 

 

 

 

부가 부를 이어가면서 더 많은 부를 축척하는 과정에서 대척점에 선 이들의 기회를 박탈한다. 단순히 '능력'이라는 단어로 치부하기엔 구조적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 개선하고자 하는 집단이 내놓은 새로운 길에 가난한 자들이 반발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대한민국이 왕정시대를 지나 공화정으로 들어서는 과정을 살펴보면 의문은 해소된다. 조선시대 초만 하더라도 기득을 가진 양반의 비율은 2%를 넘지 않고 성씨를 가진 이들도 드물었다. '개똥이', '돌쇠', '간난이'로 불렸고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어 계급이 무너지고 사회는 성을 가져야 하는 분위기로 흘렀다. 부를 가진 중인이나 노예는 이미 족보를 사서 성을 만들었고 인구의 반이 넘는 숫자는 주인 성이나 지역 유지 성을 따라 쓰게 된다. 그래서 같은 성을 가진 집장촌이 형성된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성씨인 김, 이, 박 대부분은 노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집장촌을 자랑스러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반대이다. 뼛속부터 노예였던 이들이 성씨를 가졌다고 머릿속까지 진보하거나 독립적 위치를 찾는 것은 아니다.

 

 

 

 

머리는 여전히 노예일 때 가진 근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자가 더 많은 부를 갖는 것은 나의 생존과 직접 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과 전혀 관계도 없는 기업에 더 많은 혜택을 주고 부자 편에 서는 것이 생존이라고 자리하고 있다.

 

"노예근성"이라는 정의로 행태를 비하하지만, 부자 편에 선 가난한 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사회 정의나 평등에 대한 개념조차 사치라고 생각하는 노예가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하는 것이기에 부끄러움이 없다. 논리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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