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8. 8. 4. 10:23


'대동아공영권' 을 주장하며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스스로를 '탈아입구' 라고 치켜세웠으며 국가주의를 앞세웠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주변국 중에서 자신과 상대할 수 있는 국가 없다는 것을 파악했고 대륙을 노렸다.


통일된 이후 중국 대륙을 호시탐탐 노렸던 일본은 조선을 교두보로 중국으로 향했고 일본 군부는 자신에 차 있었다. 유럽에 위치한 서구 열강은 독일이 시작한 2차대전으로 아시아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고 동아시아는 일본의 것이라는 꿈에 부풀었다.





도조 히데키


천황인 쇼와 덴노가 있기는 했으나 행정 수반인 총리가 대부분 정치적 역할을 대행하는 일본에서 실력자가 되기 위해 육군 내 파벌이었던 통제파 '도조 히데키' 가 나섰다. 도조 히데키는 군인으로서의 위치보다는 정치적인 권력욕이 강했고 본색을 드러냈다.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 통제파 파벌의 힘이 필요했고 확전하는 데 노력하며 권위를 권고하게 유지했다. 총리에 임명된 이후 내무대신, 외무대신,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이 되었으며 반대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휘체계를 무시하기도 했다.





참모총장까지 꿰찬 도조 히데키는 병사들에게 '반자이 돌격' 이나 '자결' 을 강요했으며 전장에서는 명예로 의식하게 된다. 뒤죽박죽이 된 육군과 무모한 반자이 돌격으로 병사들이 희생이 가중되었고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서 총리에서 물러나고 A급 전범으로 형장의 이슬이 된다.





무타구치 렌야


일본 패망을 앞당긴 3대 오물 '도미나가 교지'와 '츠지 마사노부' 와 함께 조선 광복을 도와준 '숨은 공로자' 라는 칭송을 얻고 있는 인물이다. 도조 히데키의 파벌에 속한 군인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된 '노구교 사건' 의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시위를 당긴 장본인이다.


일본이 중국대륙을 원하기는 했으나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이 세력을 합하면서 정세를 조심스럽게 살피던 도중 돌발적인 무타구치 렌야의 결정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난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자원이 부족해진 일본은 인도차이나를 넘보게 되고 진주만을 기습한다.





인도차이나에서 벌어진 임팔작전에서는 징기스칸이 소수 인원으로 원정을 나섰던 것을 비유해 풀과 운송하는 동물을 식량으로 대치하는 주장으로 10만에 달하는 병사를 전멸에 처하게 만들었다. A급 전범임에도 2년 옥살이 이후 77세까지 욕먹으면서 생존했다.





나구모 주이치


중일전쟁으로 자원이 부족해진 일본은 미국과 긴장이 고조되면서 수입하던 철과 석유가 부족해졌고 인도차이나로 눈을 돌렸다. 가쓰라 테프트 조약으로 필리핀을 내준 일본은 인도차이나로 향하기 위해 필리핀을 경유해야 했고 진주만을 기습하기로 결정한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는 '나구모 주이치' 에게 신중하고 위험한 임무를 주었으며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은 7척의 전함이 침몰했고 11척의 전함이 피해를 입었다. 3,500여 명에 이르는 전사자가 발생하면서 미국은 참전을 결정했으나 초기 목표인 항공모함에 손상을 주지 못했고 대규모 유류시설과 정비시설을 둔 채 퇴각했다.





나구모 주이치는 좋은 지휘관이었으나 항공모함 전술을 이해하지 못했고 함대 사령관으로서의 명성이 높았던 점을 간과했다. 나구모가 제대로 마무리를 했다면 미국은 복구하는 데만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고 태평양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즉각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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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