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8. 2. 5. 07:00


북한 핵이 개발되면서 세계 촉각이 한반도로 몰렸고 미국은 강경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코피전략' 을 언급하면서 평창 동계 올림픽으로 화해 무드를 조성하고 있는 흐름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핵을 보유하면서 냉전 시대를 개막했고 영국, 프랑스, 중국이 잇달아 핵보유국이 되면서 핵확산 금지라는 국제 이슈를 만들었습니다. NPT(Non Proliferation Treaty, 핵확산방지조약) 라는 모순은 비핵보유국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핵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이 핵확산을 방지한다는 조약을 맺은 것은 힘의 논리가 여전한 국제 사회의 단면이며 당사자인 프랑스와 중국조차도 동의하지 않다가 1992년이 되어서야 가입을 했습니다. 미가입국으로는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쿠바가 있습니다.





비폭력 저항의 대명사인 마하트마 간디의 인도는 핵 개발에 대한 요구가 크지 않았지만, 총리 자와할랄 네루는 달랐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핵 개발과 핵 보유가 필수라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중국과의 국경 분쟁으로 요구의 수위는 높아졌습니다.


네루가 사망한 지 10년이 되던 해인 1974년 인도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비밀스럽게 핵 개발을 완성했고 미국과 소련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핵 개발을 끝까지 숨기던 인도는 결국 핵 투발 수단인 미사일 개발까지 완성하게 됩니다.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파키스탄은 중국과 인도가 핵을 보유하면서 비대칭 전력이 되었고 핵 개발에 대한 의지를 갖게 됩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 대통령은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로 불리는 '압둘 카디르 칸' 박사를 파키스탄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칸 박사는 다국적 기업 유렌코에서 원자력 기술을 훔쳐 파키스탄으로 돌아왔고 핵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파키스탄이 핵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미국은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를 급파했고 핵 개발 중단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1977년 육군 참모총장 '모하메드 지아 울 하크'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부토 대통령이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표면적으로 핵 개발 문제는 종지부를 찍는 듯했습니다. 모하메드 장군은 미국에게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핵 개발 의지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의 줄기찬 요구에도 파키스탄은 겉과 속이 다른 태도를 취했으며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파키스탄에 미국은 CIA와 미군 지원기지를 구성하면서 파키스탄과 화해 무드로 향하게 됩니다.





미국 법에 규정된 핵보유국 원조 중단 원칙을 스스로 위배하기 위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았다고 국제 사회에 발표하기도 했으며 원조를 계속하라고 승인하기도 했습니다. 파키스탄은 인도와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군사적 요충지였던 파키스탄과 척을 지는 것보다 우호 관계를 맺는 방향을 택한 미국에 의해 파키스탄 핵 개발은 묵인되었고 파키스탄은 1998년 핵보유국이 됩니다. 파키스탄은 100기가 넘는 핵 탄두를 보유하고 있으며 핵전쟁에 대한 위협이 어느 곳보다 높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핵보유국이 된다는 것은 강대국의 묵인이 있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없습니다. 파키스탄이 핵보유국으로 NPT까지 미가입하면서 여전히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있는 것은 미국의 묵인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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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