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11. 29. 07:00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40여 일이 지나자 남한의 대부분은 북한의 점령지가 되었고 낙동강 이남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7월 7일 UN은 연합군이 한국전에 참전할 것을 결정하였지만 북한군의 위세는 생각보다 강했고 교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태평양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3일만에 한국으로 날아왔고 심각한 상황을 직시했습니다. 남한 내에는 제대로 된 전력이 전무했고 미국이 그동안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방치한 것에 대한 조금의 후회가 있었습니다.





국무장관 '딘 에치슨' 이 극동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할 정도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보좌진들은 동북아시아 정세에 어두웠고 감각이 없었습니다. 서둘러 연합군을 파병하기는 했지만 북한군과 소련 지원을 한 번에 끊어낼 묘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목표로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구상하고 합참과 워싱턴에 동의를 구하게 됩니다. '해리 트루먼' 보좌진은 해병대 15,000명과 보병 60,000명이 동원되는 인천 상륙작전을 승인하지 않았고 맥아더와 대척점에 서게 되면서 갈등을 겪게 됩니다.





확신에 찬 맥아더의 고집에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직접 한국으로 날아와 그를 설득하기에 이르렀지만 인천에 대한 확고한 확신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맥아더의 굳건한 믿음에 합참과 워싱턴은 굴복했고 인천 상륙작전이 감행되어 한국전의 양상은 급격하게 달라지게 됩니다.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크고 갯벌의 길이가 길어 물 때를 놓치게 되면 넓은 뻘에 상륙한 병사들이 그대로 노출될 위험이 있습니다. 선발대는 상륙 후 9시간 동안 지원을 받을 수 없으며 인천에 주둔했던 북한군들과의 교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군산이나 평택이 보급로를 차단하기에 부적합하다는 평가가 있지만 75,000명의 장병들을 두고 벌이는 상륙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율이 1/5,000이라는 과장된 수치를 써가면서 말렸던 속내가 있던 것입니다.





참모들조차 재고를 조언했던 '인천 상륙작전' 에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왜 집착했던 것일까?


맥아더 장군은 엘리트 군인 집안 출신으로 웨스트포인트에서 수석의 자리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유능한 재원이었습니다. 30대에 사단장에 취임했고 1차대전에 참전하여 15번의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최연소 소장진급, 웨스트포인트 교장과 육군 참모총장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엄친아였던 맥아더는 스스로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했고 대립각에 있었던 '존 조지프 퍼싱 원수' 의 지속적인 폄하에도 그를 존경했습니다. 워싱턴의 정치가들은 맥아더가 대통령에 오르기 위해 모험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그의 욕심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맥아더가 인천을 고집한 것은 엘리트 군인으로서 가졌던 자부심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웨스트포인트에서 수석으로 졸업하던 시기 동기였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는 132등이었고 맥아더 부관으로 군생활을 했으며 조지 패튼 소령은 호기가득한 애송이였습니다.





한참 아래 있던 아이젠하워와 패튼이 2차대전 유럽에서 엄청난 공을 세우며 명장으로 이름을 드높일 때 맥아더는 필리핀에서 후퇴하며 고배를 마셨습니다. 이후 다시 필리핀을 되찾기는 했지만 자부심 강한 엘리트 군인으로서의 명성을 빼앗긴 뒤였습니다.





아이젠하워의 뛰어난 명성 뒤에 가려졌던 맥아더가 인천 상륙작전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군인으로서의 명성을 다시 되찾을 수 있는 기회로 본 것입니다. 인천이 북한군의 보급로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이미 상륙에 대한 작전 점검이 있었다는 표면적인 명분도 있었기에 설득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맥아더가 불가능한 인천 상륙작전 'Operation Chromite' 를 고집한 덕분에 기울져가던 한국전을 뒤집는 결과를 마련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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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