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11. 26. 07:00


독일은 하나로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우수한 민족성을 가진 국민 중에 하나였고 현명하고 냉철한 민족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혼란을 겪은 20세기였지만 왕정을 벗어나 공화국이 설립되었고 현대 민주국가의 기틀을 가진 '바이마르' 가 탄생했습니다.





집중력이 좋고 높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어 생산되는 물품들의 품질을 최고의 경지였고 자동차를 비롯한 산업혁명의 기류들이 독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굴곡은 있었지만 유럽 내에서 위치를 찾아가던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라는 독재자를 만나면서 급격하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히틀러는 상당히 독특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르만 민족주의를 앞세웠지만 자신은 정작 오스트리아인이었으며 "아리아인은 날씬하고 키가 크며 강하고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 고 역설하였지만 스스로가 대부분 그 주장에 부합하지 못했습니다.





히틀러의 할머니가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를 데리고 히틀러가와 재혼하면서 성을 따랐지만 친조부에 대한 정보는 전무합니다. 친조부계까지 유대계가 아니어야 한다는 순혈주의를 펼쳤던 히틀러의 친조부가 유대계였을 가능성에 대해 여전히 의문입니다.





1차대전에 참전한 상병 히틀러는 참호 사이를 누비며 연락병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으나 에리히 루덴도르프을 앞세운 쿠테타에 참가해 실패를 하면서 5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고 저서 '나의 투쟁' 을 옥중에서 집필했습니다.





군에 몸담았을 시절 공산주의자를 색출한다는 소문에 스스로 자원하여 동료들을 사찰하고 고발하는 비열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나치스)에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대중을 사로잡는 언변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경쟁자였던 공산주의와 대척점에 선 때 바이마르 공화국 1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맹장염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서 사망했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새로운 기조가 생깁니다. 나치당이 사회민주당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히틀러가 조금씩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1928년 치뤄진 선거에서 나치당과 히틀러는 압승을 예상했지만 100만 표를 얻지 못했고 의석을 12석 밖에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공산당은 나치당의 3배에 달하는 의석을 차지했고 사회민주당은 1,000만 표가 넘는 몰표를 획득하면서 히틀러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인지도가 오르기는 했지만 선거에서 추락하는 나치당과 히틀러가 새로운 기회를 마련하게 되는 뜻하지 않는 변수를 만나게 되는데...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 대공황..."


미국발 경제 공황은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1차대전 책임으로 채결된 '베르사유 조약' 으로 엄청난 배상금을 책임져야 하는 독일과 독일 국민들에게 직접적인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독일 국민은 춥고 배고팠으며 삶이 피폐해지면서 세상의 중심이어야 한다고 역설한 히틀러의 전체주의가 폭발적인 호응을 얻게 됩니다.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마구 발행했던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서 1마르크하던 빵이 4,600억 마르크까지 치솟았습니다.





잘못된 정책을 직접적으로 규탄한 히틀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청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심각하게 연습한 결과가 빛을 보기 시작합니다. 1차대전에서 명성을 얻은 헤르만 괴링과 마틴 보르만이 합류하였고 칼 마르크스를 신봉하던 요제프 괴벨스가 선동에 나섰습니다.





배고프고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히틀러와 괴벨스의 선전에 심취된 독일인들은 단체 최면에 걸렸고 2차대전을 일으키는 데 절대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2.6%의 지지율을 가진 나치당이 득세하였고 히틀러가 총리에 부임하면서 숙청작업을 거쳤으며 나치당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독일 육군 장성들까지 히틀러의 게르만 민족주의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독일은 걷잡을 수 없는 나락의 첫단추를 끼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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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